神林慶州
Bae Bien U
Bae Bien U
Bae Bien U, SNM5A-035H, 2019, 110x210cm
Bae Bien U, SNM5A-037H, 2019, 110x210cm
Bae Bien U, SNM3A-038, 2022
Bae Bien U, SNM3A-064, 2022
Bae Bien U, SNM5A-036H, 2019, 110x210cm
神林慶州, Installation in Obscura, 2023
회화가 가진 평면적 조형성을 구조화하여 입체로 확장시키는 홍정욱의 개인전 [ENTITY]가 오는 10월 28일 옵스큐라에서 개최된다. 이번 전시는 다양한 소재의 시도와 개체의 결합을 통해 복합적 구조를 이루는 신작 20여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홍정욱의 작업은 회화가 가진 물질적 평면성의 형식적 연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작업은 입체 캔버스에 나무, 철사, 유리 등의 다양한 개체 결합을 통해 반입체(부조)적인 작업과 벽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적인 입체구조작업, 두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전자의 경우는 작가의 대표적 형식으로 다양한 캔버스의 변주를 선보였다. 후자의 경우는 나무와 철을 사용하여 구조체 작업을 진행하거나 입체캔버스를 결합한 형식의 작업을 선보였다. [ENTITY]에서도 이러한 특징들이 나타나는 작업들을 확인 할 수 있는데 그 중 “cacophony”는 입체 캔버스 형식으로 진행된 대형 작업의 첫 시도이다.
‘Entity’는 ‘실체’, ‘존재’, ‘자주적인 것’, ‘본질’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회화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소재적인 결합, 구조적인 결합, 설치 과정의 결합을 통해 ‘독립적인 집합’의 시각화 이루는 홍정욱의 작업은 개념과 정보를 조합하는 양식에서 ‘Entity’의 어원적 맥락을 함축하고 있다. 바리솔(barrisol)을 사용하여 구조적 시각화에 새로운 시도가 엿보이는 Infill 시리즈는 적극적인 Entity 개념이 확인할 수 있다.
[ENTITY] 전시는 평면 그 자체의 변주와 평면이 입체로 확장되는 형식적 변주를 통해 현대적인 조형 언어를 보여준다. 더불어 작가에게 드로잉과 같은 미니 작업들도 공개되어 작품이 구상되고 조합되는 과정을 면밀히 살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옵스큐라
홍정욱의 작업은 회화가 가진 물질적 평면성의 형식적 연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작업은 입체 캔버스에 나무, 철사, 유리 등의 다양한 개체 결합을 통해 반입체(부조)적인 작업과 벽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적인 입체구조작업, 두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전자의 경우는 작가의 대표적 형식으로 다양한 캔버스의 변주를 선보였다. 후자의 경우는 나무와 철을 사용하여 구조체 작업을 진행하거나 입체캔버스를 결합한 형식의 작업을 선보였다. [ENTITY]에서도 이러한 특징들이 나타나는 작업들을 확인 할 수 있는데 그 중 “cacophony”는 입체 캔버스 형식으로 진행된 대형 작업의 첫 시도이다.
‘Entity’는 ‘실체’, ‘존재’, ‘자주적인 것’, ‘본질’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회화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소재적인 결합, 구조적인 결합, 설치 과정의 결합을 통해 ‘독립적인 집합’의 시각화 이루는 홍정욱의 작업은 개념과 정보를 조합하는 양식에서 ‘Entity’의 어원적 맥락을 함축하고 있다. 바리솔(barrisol)을 사용하여 구조적 시각화에 새로운 시도가 엿보이는 Infill 시리즈는 적극적인 Entity 개념이 확인할 수 있다.
[ENTITY] 전시는 평면 그 자체의 변주와 평면이 입체로 확장되는 형식적 변주를 통해 현대적인 조형 언어를 보여준다. 더불어 작가에게 드로잉과 같은 미니 작업들도 공개되어 작품이 구상되고 조합되는 과정을 면밀히 살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옵스큐라
사진의 눈과 혀, 시각의 귀와 코
― 배병우 사진이 발생시키는 비시각적 시각 기관들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시각의 작용이다. 시각의 유일한 대상이 되는 세계의 실상은 정지가 아니라 운동이다. 시각은 그러한 운동을 마치 정지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착각’은 우리에게 유용한 것, 왜냐하면 시각은 그렇게 시시각각으로 운동하며 변화하고 있는 세계의 사태를 마치 그 각각이 정지되어 있는 화면인 듯 단순화하고 추상화함으로써 우리에게 순간의 판단과 해석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여 행동을 위해 가공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사진에서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사진은 그러한 시각의 정지를 ‘정지’ 그 자체로 보여주는 작업이라고 말해야 한다. 누군가의 시각이 사진을 통해 이미 하나의 정지로서 파악한 화면이 바로 우리의 또 다른 시각 앞에 그렇게 또한 다시금 ‘정지’ 자체로서 놓여 있다. 나는 사실 그 장면을 보았던 다른 이의 시각, 바로 그것을 보고 있는 또 다른 이중의 시각을 지닌 자이다. 사진 앞에서, 나는 시각을 보는 시각, 무언가를 바라보았던 순간의 눈을 바라보는 다른 순간의 또 하나의 눈이 된다. 이는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어린 시절 마치 자신 외에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꼈던 하나의 작은 경이를 마주했던 순간의 기억과 다르지 않다. “나는 황제를 보았던 눈을 보고 있다(Je vois les yeux qui ont vu l’Empereur.” 그러나 그가 바로 이어 말하듯, 이러한 경험들은 사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외로움의 파편들이다. “삶은 그렇게 작은 고독의 편린들로 이루어져 있다(la vie est ainsi faite à coups de petites solitudes).” 누군가 순간으로 보았고 또 그렇게 포착된 하나의 정지된 화면은 우리 각각의 눈앞에 다시 한 번 하나의 ‘정지’로서 출현한다. 그렇다면 사진에서의 이 ‘이차적’이며 미학적인 시각이란 우리의 물리적 능력으로서의 ‘일차적’ 시각과 어떤 의미에서 정반대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가. 시각이 실제적 운동을 허구적 ‘정지’로 바꿔 포착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면, 반대로 사진은 허구적 정지를 (재)현시함을 통해 오히려 그 정지 안에서 포착 불가능한 실제적 운동을 복권한다. 움직이지 않는 하나의 고정된 화면과 그 멈춤의 시각으로서 우리 눈앞에 제시된 사진의 정물(still life) 또는 풍경(landscape)은,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게 정(靜)을 통해 그 안에 잠재되어 있는 동(動)을 보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 말의 목소리, 그러나 그 어떤 소리도 없는 이 침묵의 목소리가 사진이 그 자신의 정지된 시각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는 운동하는 청각의 장을 구성한다. 나는 바로 이 시각/청각의 지점에서 시작하고 여기에서 끝날 것이며, 그 끝은 사진의 또 다른 시작이 될 것이다.
배병우의 소나무 이미지들이 들려주는 그 침묵의 목소리, 그 들리지 않는 소리의 풍경이 정확히 바로 그러한 사진의 시작이자 끝은 아닐 것인가. 왜냐하면, 그 사진이 단지 소나무라는 물리적이고 자연적인 피사체(객체/주체)를 찍은 ‘사진’을 넘어, 그 사진 자체의 움직이지 않는 시각이, 그 순간의 포착이, 바로 그 순간 자신을 넘어 바로 그 순간 속에서 포착되지 못했던 운동을, 그 앞뒤로, 혹은 그 안팎으로, 그렇게 계속해서 연장되었고 연장되고 있으며 연장될 실제적 운동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사진은 그 자신의 정지된 화면이라는 포착 가능성을 통해서 거꾸로 그 자신이 담지 못했던 세계의 운동이라는 포착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뒤집어진 시각이다. 그러므로 사진은 사진의 본질을, 즉 그 자신이 지닌 그 본질의 비본질적 성격, 그 가능성의 불가능성을, 바로 사진 그 자신 안에서 드러내는 기이한 매체이자 (反)시각적 방식이며 이질적 예술이자 역설의 행동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이, 그렇게 역설적이고 이질적으로, 배병우의 정지된 화면들이 표출하는 변화하는 세계의 운동이 사진을 넘어선 사진이 되는 이유이다. 모든 예술은 어떤 의미에서 그 자신의 완전한 소멸을 통해 거꾸로 바로 그 자신의 완성을 희구하는 괴이한 형식-내용이다. 완전히 그 자신의 가능성을 소진하여 오히려 그 본질적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데에서 역설적으로 (미)완성되는 예술의 이상이 바로 이렇게 사진 안에서도 나타난다, 그렇게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드러난다. 그러므로 사진의 예술은, 그렇게 멈춰진 듯 움직이며, 불가능한 시각 자체가 시각적 가능성의 근본조건임을 보이는 정중동(靜中動)의 화면이 되고, 그렇게 소리 없이 소리 내며, 가능한 모든 것들의 소리가 바로 그 침묵의 불가능성을 통해 들리는 부재(不在)하는 존재(存在)의 풍경이 되며, 그렇기에 또한 보이는 것 안에서는 보이지 않으면서, 한 화면 안에 갇힌 특수한 형태가 오히려 그 화면 밖으로 뻗어가는 보편적인 것을 드러내며 편재(偏在)하는 편재(遍在)의 세계를 제시하는 이미지가 된다. 나는 배병우의 사진이 바로 이러한 세계의 조각이자 이러한 소리들의 고독한 파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어두운 단색의 화면들은 오히려 세계의 잡다한 색채들을 포함하고 있고, 그의 고요한 풍경들은 반대로 세계의 다종한 운동의 소음들을 채집하고 있으며, 그의 화면 속에서 보이는 시각적 대상들은 거꾸로 그 시각이 비로소 시각으로서 가능해지는 어떤 불가능한 맹점을 (비)시각적으로 사건화(事件化)하며 증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나는 바로 이 맹점의 지점에 사진의 비본질적 기원의 본질, 그 부재의 역설적 존재, 그 불가능성의 가장 큰 가능성이 사라지듯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소나무들이 그 자신들 사이에 숨김으로써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라지는 도사림의 형식, 지극히 고요한 형식 안에서 오히려 가장 아프고 무참하게 찌르는/찔리는 상처, 지극히 절제된 무색의 색채 안에서 거꾸로 종횡무진으로 드러나는/드러내는 세계의 운동이 남긴 흔적, 그 상처와 흔적의 증언에 다름 아니다.
역사가 지워진 역사, 마치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존재하는 종묘를 본 적이 있다. 그 안에서 내가 느꼈던 슬픔의 운동하지 않는 운동, 그러나 분명 그 정지 속에서 여전히 꿈틀대며 한없이 틈을 벌리고 상처를 내며 끝없이 흔적을 남기고 있는 비운의 운동은, 바로 그 종묘의 침묵이 증언하는 어떤 말 없는 말이었다. 배병우가 그 종묘를 통해 바라보았던 상처로서의 세계 역시 바로 그 침묵의 말, 그 움직이지 않는 운동을 담고 있는 슬픔과 아픔의 형식-내용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그가 이전에 바라보았고 바로 지금 드러내고 있는 시각 앞에 서 있는 또 다른 시각의 소유자이다. 이 세계는 아프다, 헛되다. 그러나 그 세계는 그 아픔을 말할 수 있는 혀가 없고 그 헛됨을 볼 수 있는 눈이 없다. 그렇다면 사진이 바로 그 혀이자 눈이 될 수는 없을까, 아니, 어쩌면 이미 사진은 바로 그 혀이자 눈이 되었음을 증언하며, 그 자신도 갖고 있지 못한 혀와 눈을 통해서, 아니, 아마도 새로 귀와 코를 내어서, 그렇게 그 세계의 소리 없는 소리와 냄새 없는 냄새를 듣고 또 맡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배병우의 사진은 여기서 단순히 정지된 시각의 화면이 되기를 멈추고 이렇듯 변화하는 시각을 지닌 세계의 감각기관이 되기 위해 움직인다. 카메라는 어쩌면 도구에 불과할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마도 카메라는 매체를 넘어선 매체, 그 사라지는 매개가 남긴 흔적 안에서 매개조차도 미처 매개하지 못하는 빗소리가 아직 그치지 않는다. 비는 그렇게 계속 아프게 내리지만, 그 비통한 빗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 소리 없는 소리를 비로소 그렇게 아픈 것으로 보이기 위해, 카메라는 작동한다. 그 소리를 보았던 시각을 사진으로 마주하고 다시 그 세계의 비극을 우리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그렇게 듣는다, 냄새 맡는다. 하여 카메라는 그렇게, 시각 없는 시각 안에서, 소리 없는 소리 안에서, 향 없는 냄새 속에서, 아마도 영원히 헤맬 것, 무한히 부유할 것, 그래서 길을 잃을 것이다. 그리고 배병우의 사진이 비로소 ‘사진’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그렇게 이 세계를 증언하는 혀이자 눈, 아니 차라리 귀이자 코가 되고자 계속 저 풍경들 속을 방황하는 신체 없는 기관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길을 잃음으로써 비로소 드러나는 하나의 길. 나는 이렇게 이 궤적/흔적의 끝을 바로 이 길 위에서 시작해야 하고, 다시 그렇게 저 방황/상흔의 시작을 거기에서 끝맺어야 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그래서 여전히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 그 모든 사진 속으로 나 있는 여정의 길들 위에서.
◼️홍정욱
― 배병우 사진이 발생시키는 비시각적 시각 기관들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시각의 작용이다. 시각의 유일한 대상이 되는 세계의 실상은 정지가 아니라 운동이다. 시각은 그러한 운동을 마치 정지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착각’은 우리에게 유용한 것, 왜냐하면 시각은 그렇게 시시각각으로 운동하며 변화하고 있는 세계의 사태를 마치 그 각각이 정지되어 있는 화면인 듯 단순화하고 추상화함으로써 우리에게 순간의 판단과 해석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여 행동을 위해 가공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사진에서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사진은 그러한 시각의 정지를 ‘정지’ 그 자체로 보여주는 작업이라고 말해야 한다. 누군가의 시각이 사진을 통해 이미 하나의 정지로서 파악한 화면이 바로 우리의 또 다른 시각 앞에 그렇게 또한 다시금 ‘정지’ 자체로서 놓여 있다. 나는 사실 그 장면을 보았던 다른 이의 시각, 바로 그것을 보고 있는 또 다른 이중의 시각을 지닌 자이다. 사진 앞에서, 나는 시각을 보는 시각, 무언가를 바라보았던 순간의 눈을 바라보는 다른 순간의 또 하나의 눈이 된다. 이는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어린 시절 마치 자신 외에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꼈던 하나의 작은 경이를 마주했던 순간의 기억과 다르지 않다. “나는 황제를 보았던 눈을 보고 있다(Je vois les yeux qui ont vu l’Empereur.” 그러나 그가 바로 이어 말하듯, 이러한 경험들은 사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외로움의 파편들이다. “삶은 그렇게 작은 고독의 편린들로 이루어져 있다(la vie est ainsi faite à coups de petites solitudes).” 누군가 순간으로 보았고 또 그렇게 포착된 하나의 정지된 화면은 우리 각각의 눈앞에 다시 한 번 하나의 ‘정지’로서 출현한다. 그렇다면 사진에서의 이 ‘이차적’이며 미학적인 시각이란 우리의 물리적 능력으로서의 ‘일차적’ 시각과 어떤 의미에서 정반대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가. 시각이 실제적 운동을 허구적 ‘정지’로 바꿔 포착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면, 반대로 사진은 허구적 정지를 (재)현시함을 통해 오히려 그 정지 안에서 포착 불가능한 실제적 운동을 복권한다. 움직이지 않는 하나의 고정된 화면과 그 멈춤의 시각으로서 우리 눈앞에 제시된 사진의 정물(still life) 또는 풍경(landscape)은,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게 정(靜)을 통해 그 안에 잠재되어 있는 동(動)을 보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 말의 목소리, 그러나 그 어떤 소리도 없는 이 침묵의 목소리가 사진이 그 자신의 정지된 시각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는 운동하는 청각의 장을 구성한다. 나는 바로 이 시각/청각의 지점에서 시작하고 여기에서 끝날 것이며, 그 끝은 사진의 또 다른 시작이 될 것이다.
배병우의 소나무 이미지들이 들려주는 그 침묵의 목소리, 그 들리지 않는 소리의 풍경이 정확히 바로 그러한 사진의 시작이자 끝은 아닐 것인가. 왜냐하면, 그 사진이 단지 소나무라는 물리적이고 자연적인 피사체(객체/주체)를 찍은 ‘사진’을 넘어, 그 사진 자체의 움직이지 않는 시각이, 그 순간의 포착이, 바로 그 순간 자신을 넘어 바로 그 순간 속에서 포착되지 못했던 운동을, 그 앞뒤로, 혹은 그 안팎으로, 그렇게 계속해서 연장되었고 연장되고 있으며 연장될 실제적 운동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사진은 그 자신의 정지된 화면이라는 포착 가능성을 통해서 거꾸로 그 자신이 담지 못했던 세계의 운동이라는 포착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뒤집어진 시각이다. 그러므로 사진은 사진의 본질을, 즉 그 자신이 지닌 그 본질의 비본질적 성격, 그 가능성의 불가능성을, 바로 사진 그 자신 안에서 드러내는 기이한 매체이자 (反)시각적 방식이며 이질적 예술이자 역설의 행동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이, 그렇게 역설적이고 이질적으로, 배병우의 정지된 화면들이 표출하는 변화하는 세계의 운동이 사진을 넘어선 사진이 되는 이유이다. 모든 예술은 어떤 의미에서 그 자신의 완전한 소멸을 통해 거꾸로 바로 그 자신의 완성을 희구하는 괴이한 형식-내용이다. 완전히 그 자신의 가능성을 소진하여 오히려 그 본질적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데에서 역설적으로 (미)완성되는 예술의 이상이 바로 이렇게 사진 안에서도 나타난다, 그렇게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드러난다. 그러므로 사진의 예술은, 그렇게 멈춰진 듯 움직이며, 불가능한 시각 자체가 시각적 가능성의 근본조건임을 보이는 정중동(靜中動)의 화면이 되고, 그렇게 소리 없이 소리 내며, 가능한 모든 것들의 소리가 바로 그 침묵의 불가능성을 통해 들리는 부재(不在)하는 존재(存在)의 풍경이 되며, 그렇기에 또한 보이는 것 안에서는 보이지 않으면서, 한 화면 안에 갇힌 특수한 형태가 오히려 그 화면 밖으로 뻗어가는 보편적인 것을 드러내며 편재(偏在)하는 편재(遍在)의 세계를 제시하는 이미지가 된다. 나는 배병우의 사진이 바로 이러한 세계의 조각이자 이러한 소리들의 고독한 파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어두운 단색의 화면들은 오히려 세계의 잡다한 색채들을 포함하고 있고, 그의 고요한 풍경들은 반대로 세계의 다종한 운동의 소음들을 채집하고 있으며, 그의 화면 속에서 보이는 시각적 대상들은 거꾸로 그 시각이 비로소 시각으로서 가능해지는 어떤 불가능한 맹점을 (비)시각적으로 사건화(事件化)하며 증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나는 바로 이 맹점의 지점에 사진의 비본질적 기원의 본질, 그 부재의 역설적 존재, 그 불가능성의 가장 큰 가능성이 사라지듯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소나무들이 그 자신들 사이에 숨김으로써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라지는 도사림의 형식, 지극히 고요한 형식 안에서 오히려 가장 아프고 무참하게 찌르는/찔리는 상처, 지극히 절제된 무색의 색채 안에서 거꾸로 종횡무진으로 드러나는/드러내는 세계의 운동이 남긴 흔적, 그 상처와 흔적의 증언에 다름 아니다.
역사가 지워진 역사, 마치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존재하는 종묘를 본 적이 있다. 그 안에서 내가 느꼈던 슬픔의 운동하지 않는 운동, 그러나 분명 그 정지 속에서 여전히 꿈틀대며 한없이 틈을 벌리고 상처를 내며 끝없이 흔적을 남기고 있는 비운의 운동은, 바로 그 종묘의 침묵이 증언하는 어떤 말 없는 말이었다. 배병우가 그 종묘를 통해 바라보았던 상처로서의 세계 역시 바로 그 침묵의 말, 그 움직이지 않는 운동을 담고 있는 슬픔과 아픔의 형식-내용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그가 이전에 바라보았고 바로 지금 드러내고 있는 시각 앞에 서 있는 또 다른 시각의 소유자이다. 이 세계는 아프다, 헛되다. 그러나 그 세계는 그 아픔을 말할 수 있는 혀가 없고 그 헛됨을 볼 수 있는 눈이 없다. 그렇다면 사진이 바로 그 혀이자 눈이 될 수는 없을까, 아니, 어쩌면 이미 사진은 바로 그 혀이자 눈이 되었음을 증언하며, 그 자신도 갖고 있지 못한 혀와 눈을 통해서, 아니, 아마도 새로 귀와 코를 내어서, 그렇게 그 세계의 소리 없는 소리와 냄새 없는 냄새를 듣고 또 맡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배병우의 사진은 여기서 단순히 정지된 시각의 화면이 되기를 멈추고 이렇듯 변화하는 시각을 지닌 세계의 감각기관이 되기 위해 움직인다. 카메라는 어쩌면 도구에 불과할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마도 카메라는 매체를 넘어선 매체, 그 사라지는 매개가 남긴 흔적 안에서 매개조차도 미처 매개하지 못하는 빗소리가 아직 그치지 않는다. 비는 그렇게 계속 아프게 내리지만, 그 비통한 빗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 소리 없는 소리를 비로소 그렇게 아픈 것으로 보이기 위해, 카메라는 작동한다. 그 소리를 보았던 시각을 사진으로 마주하고 다시 그 세계의 비극을 우리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그렇게 듣는다, 냄새 맡는다. 하여 카메라는 그렇게, 시각 없는 시각 안에서, 소리 없는 소리 안에서, 향 없는 냄새 속에서, 아마도 영원히 헤맬 것, 무한히 부유할 것, 그래서 길을 잃을 것이다. 그리고 배병우의 사진이 비로소 ‘사진’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그렇게 이 세계를 증언하는 혀이자 눈, 아니 차라리 귀이자 코가 되고자 계속 저 풍경들 속을 방황하는 신체 없는 기관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길을 잃음으로써 비로소 드러나는 하나의 길. 나는 이렇게 이 궤적/흔적의 끝을 바로 이 길 위에서 시작해야 하고, 다시 그렇게 저 방황/상흔의 시작을 거기에서 끝맺어야 한다, 아직 끝나지 않은, 그래서 여전히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 그 모든 사진 속으로 나 있는 여정의 길들 위에서.
◼️홍정욱
홍정욱(b.1976)은 홍익대학교에서 회화과와 일반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하고 런던대학교 슬레이드 미술 대학원(UCL Slade School of Fine Art, UK)에서 석사 학위(MFA)를 받았다. 'plano-' (리안갤러리, 서울, 2019), 'in situ' (김종영 미술관, 서울, 2013), ‘ball of line’(룩스 갤러리, 서울, 2003) 등에서 11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한미 갤러리(서울), Babel(트론헤임, 노르웨이), 일우 스페이스(서울), 경기도 미술관(안산), OCI 미술관(서울), Centre d'Art Tecla Sala(바르셀로나), James Freeman Gallery(런던) 등에서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주요 수상으로는 김종영 미술관 오늘의 작가(2013, 김종영 미술관), Guasch Coranty International Painting Prize 2010(finalist, 바르셀로나), New Contemporaries 2009(finalist, 런던), 제 4회 송은미술대전(2004, 입선, 서울)이 있다. 노르웨이 트론헤임의 LKV(Lademoen Kunstnerverksteder, 2015), OCI 미술관 창작스튜디오(2014), 국립현대미술관 고양창작스튜디오(2013)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그의 작품은 서울시립미술관, OCI 미술관, 현대카드, 유진투자증권,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등에 소장되어 있다.
[ENTITY]
홍정욱
2022.10.28.-11.20
옵스큐라
서울시 성북구 성북로23길 164
초대 일시 : 10월 28일 금요일 오후 5시
관람 시간 : 11:00-18:00 (매주 일, 월 휴관)
내부 관람은 예약으로 진행합니다.(인스타그램 DM, 옵스큐라 대표전화, 이메일)
obscuramaster@naver.com
홍정욱
2022.10.28.-11.20
옵스큐라
서울시 성북구 성북로23길 164
초대 일시 : 10월 28일 금요일 오후 5시
관람 시간 : 11:00-18:00 (매주 일, 월 휴관)
내부 관람은 예약으로 진행합니다.(인스타그램 DM, 옵스큐라 대표전화, 이메일)
obscuramaste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