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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혜진 Yoon, Haejin 尹恵珍
Dancing Zelkova
2018.11.01-2019.01.11
나무가 춤을 춘다.
지구에 뿌리를 내린 채
해와 달을 지나서,
우주너머 空을 향해간다.
지구, 달, 태양이 서로 뒤엉키며 하나 되는 찰나,
파편화된 기억은 뭉쳐지고 단단한 자아는 해체되어 간다.
내가 나무가 되고 나무는 우주가 된다.
우주가 나무가 되고 나무는 내가 된다.
느티나무가 춤을 춘다.
나, 나무, 우주,
다 사라질 때까지……
윤혜진
지구에 뿌리를 내린 채
해와 달을 지나서,
우주너머 空을 향해간다.
지구, 달, 태양이 서로 뒤엉키며 하나 되는 찰나,
파편화된 기억은 뭉쳐지고 단단한 자아는 해체되어 간다.
내가 나무가 되고 나무는 우주가 된다.
우주가 나무가 되고 나무는 내가 된다.
느티나무가 춤을 춘다.
나, 나무, 우주,
다 사라질 때까지……
윤혜진
동네 어르신들의 사랑방인 북정 마을의 정자. 어디에나 그렇듯 정자 옆에는 나무 한 그루가 있다. 모든 나무가 그러하듯 나무는 봄부터 햇살로 키워온 잎으로 그늘을 만들고, 지나가는 바람에 몸을 맡겨 소리 내며, 새들이 머물 수 있는 안식처가 된다. 이렇게 푸릇하고 따뜻했던 나무의 시간은 지나가고 하늘의 색만으로 채워지는 겨울이 찾아왔다. 이 겨울에 찾아온 <Dancing Zelkova>는 지난 계절, 나무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듯 나무의 한편에 머물던 사람과 새처럼 지나가던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무(無)로부터 유(有)한 어떤 것이 만들어질 때는 순간의 힘이 요구된다. 색과 붓이 어우러져 순간에 그려진 궤적은 비록 유의미하게 계획된 것이라 할지라도 즉흥적인 힘에 의해서만 비로소 형상화될 수 있다. 윤혜진 작가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많은 형상은 무에서 유로 막 첫발을 내디딘 태초의 모습을 하고 있다. 태초의 모습은 순수하고 여린 느낌을 주면서 동시에 익숙하지 않은 생소함을 안겨 주기도 한다. 정제되어 있지 않은 날것의 모습에서 역설적이게도 섬뜩하고 낯선 느낌이 든다. 이 모순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지 두 가지 사항을 짚어보려 한다. 첫째는 태초의 형상을 주목시키는 원인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사방으로 뻗어있는 여러 손으로 리듬을 타는 아이는 단지 의인화한 나무가 춤추는 것으로만 시선을 끄는 것이 아니다. 체계적이고 강력한 이끌림을 스스로 발현하여 관람자를 자신에게 주목하게 만든다. 가슴의 드로잉처럼 그 어떤 유기체보다 더 정교함을 갖추고 있는 태초의 형상은 관람자가 그것의 현현에 관심을 두고 수동적으로 다가서게 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자가 직접 스스로를 작품 앞에 세우게 만든다. 즉, 관람자 자신의 시선이라는 주체적 힘보다 태초의 형상이 가진 힘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두 번째는 털, 가죽의 사용에 주목해야 한다. 작가는 화면의 한 부분, 인형의 한 부분에 털이나 가죽을 자주 사용한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인형에도 머리 부분이 짙은 갈색의 털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 인형의 몸은 팔, 다리로 구성된 일반적인 신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비해 얼굴은 눈, 코, 입의 형상 없이 털로만 되어있다. 털은 그것으로 감싸진 동물의 형상이 명확히 보였을 때나, 반대로 가공된 직물임이 확인될 때는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신체에 대한 명확한 정보 없이 모호한 경계 선상에서 마주하게 되면 그것에 대한 두려움과 섬뜩함은 커진다. 인형의 몸이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해가 지고 어둑해진 시간에, 스치듯 마주한 털 덩어리는 모호함의 경계 사이에 위치한다. 윤혜진 작가의 태초 형상에서 느껴지는 모순된 감정의 동시적 상기는 선이나 악과 같은 대립하는 상징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무와 유의 경계 그 사이에서 일어난 변화의 힘에, 익숙하지만 낯선 힘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계의 힘에 우리는 이끌리는 것이다.
작가는 생명의 시작 순간에 대해 여러 기표를 통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기표 자체로 모든 의미를 담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기표들은 단서와 같아서 진리를 향해 한 방향을 가르키고 있지만, 진리 그 자체는 아니다.
“작품의 진리는 존재하면서 부재한다. 진리는 결코 작품 속에서 한 번에 현전하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기표의 놀이, 즉 그것들의 차이, 연기, 산포의 유희뿐이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
데리다의 말처럼 하나의 기표는 다른 것들과 차이를 이루며 다른 기표로 연기되면서, 존재하는 동시에 부재하는 흔적이 된다. 그것은 방금 떠났다가, 떠나려고 되돌아왔다가, 다시 떠난다. 예술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작품의 의미, 그것의 진리는 존재하면서 동시에 부재한다. 느티나무의 흔들림은 사방으로 뻗어있는 여러 손으로 리듬을 타는 아이가 되었다. 그 아이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인형과 같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그 인형은 두려운 공포를 안겨준다. 그러나 곧 생명의 흔적이 아님을 확인하고 안도한다. 순간 부는 바람에 느티나무가 흔들린다.
박우진
무(無)로부터 유(有)한 어떤 것이 만들어질 때는 순간의 힘이 요구된다. 색과 붓이 어우러져 순간에 그려진 궤적은 비록 유의미하게 계획된 것이라 할지라도 즉흥적인 힘에 의해서만 비로소 형상화될 수 있다. 윤혜진 작가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많은 형상은 무에서 유로 막 첫발을 내디딘 태초의 모습을 하고 있다. 태초의 모습은 순수하고 여린 느낌을 주면서 동시에 익숙하지 않은 생소함을 안겨 주기도 한다. 정제되어 있지 않은 날것의 모습에서 역설적이게도 섬뜩하고 낯선 느낌이 든다. 이 모순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지 두 가지 사항을 짚어보려 한다. 첫째는 태초의 형상을 주목시키는 원인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사방으로 뻗어있는 여러 손으로 리듬을 타는 아이는 단지 의인화한 나무가 춤추는 것으로만 시선을 끄는 것이 아니다. 체계적이고 강력한 이끌림을 스스로 발현하여 관람자를 자신에게 주목하게 만든다. 가슴의 드로잉처럼 그 어떤 유기체보다 더 정교함을 갖추고 있는 태초의 형상은 관람자가 그것의 현현에 관심을 두고 수동적으로 다가서게 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자가 직접 스스로를 작품 앞에 세우게 만든다. 즉, 관람자 자신의 시선이라는 주체적 힘보다 태초의 형상이 가진 힘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두 번째는 털, 가죽의 사용에 주목해야 한다. 작가는 화면의 한 부분, 인형의 한 부분에 털이나 가죽을 자주 사용한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인형에도 머리 부분이 짙은 갈색의 털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 인형의 몸은 팔, 다리로 구성된 일반적인 신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비해 얼굴은 눈, 코, 입의 형상 없이 털로만 되어있다. 털은 그것으로 감싸진 동물의 형상이 명확히 보였을 때나, 반대로 가공된 직물임이 확인될 때는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신체에 대한 명확한 정보 없이 모호한 경계 선상에서 마주하게 되면 그것에 대한 두려움과 섬뜩함은 커진다. 인형의 몸이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해가 지고 어둑해진 시간에, 스치듯 마주한 털 덩어리는 모호함의 경계 사이에 위치한다. 윤혜진 작가의 태초 형상에서 느껴지는 모순된 감정의 동시적 상기는 선이나 악과 같은 대립하는 상징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무와 유의 경계 그 사이에서 일어난 변화의 힘에, 익숙하지만 낯선 힘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계의 힘에 우리는 이끌리는 것이다.
작가는 생명의 시작 순간에 대해 여러 기표를 통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기표 자체로 모든 의미를 담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기표들은 단서와 같아서 진리를 향해 한 방향을 가르키고 있지만, 진리 그 자체는 아니다.
“작품의 진리는 존재하면서 부재한다. 진리는 결코 작품 속에서 한 번에 현전하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기표의 놀이, 즉 그것들의 차이, 연기, 산포의 유희뿐이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
데리다의 말처럼 하나의 기표는 다른 것들과 차이를 이루며 다른 기표로 연기되면서, 존재하는 동시에 부재하는 흔적이 된다. 그것은 방금 떠났다가, 떠나려고 되돌아왔다가, 다시 떠난다. 예술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작품의 의미, 그것의 진리는 존재하면서 동시에 부재한다. 느티나무의 흔들림은 사방으로 뻗어있는 여러 손으로 리듬을 타는 아이가 되었다. 그 아이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인형과 같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그 인형은 두려운 공포를 안겨준다. 그러나 곧 생명의 흔적이 아님을 확인하고 안도한다. 순간 부는 바람에 느티나무가 흔들린다.
박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