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ERGE_COMECOMECOME
SEONKYUNG SON
SEONKYUNG SON
옵스큐라(obscura)의 세 번째 프로젝트로 손선경의 개인전 ‘emerge: comecomecome’이 2019년 10월 21일부터 12월 25일까지 성북동 북정마을 옵스큐라에서 진행된다. 인물의 단순한 행위 반복을 라인 드로잉 에니메이션 작업으로 보여주는 손선경 작가는 ‘마트료시카(matryoshka)’ 시리즈를 새롭게 선보인다. ‘나로부터 나를 낳고, 나로부터 나를 벗는’ 반복된 행위는 작은 윤회 속에 관객을 위치하게 한다. 영상작업과 더불어 핸드 드로잉 작업이 함께 전시되는 이번 전시의 윈도우 관람은 매일 6시부터 22시까지이고 내부 관람은 매주 월, 수에 가능하다. 전시 관련 행사로 작가와의 대화가 12월 14일(토요일)에 예정되어 있다. ◼️옵스큐라
emerge_comecomecome
하얀 집 안에 흰 프레임의 모니터. 그리고 그 모니터 안에는 하얀 배경 속 검은 선으로 그려진 인물들이 단순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옵스큐라 윈도우를 통해 바라본 모니터 속 인물들은 각자의 공간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윈도우를 사이에 두고 바라본 인물들은 전적으로 타자에 불과하고 그 행위는 정적(靜的)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전시장 안으로 들어설수록 겹겹이 더해지는 각기 다른 소리의 층 차는 정적을 깨고 외부에서 무심하게 타인을 바라보던 시선을 삶의 한가운데로 옮겨놓는다.
손선경의 “emerge_comecomecome”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나타나는 교감의 이중적 교차는 그의 작업에서도 동일하게 진행된다. 화면 속 인물들은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삽질하며, 옷을 벗고, 어디론가 들어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등 격하지 않은 소소한 행동들을 무한히 반복한다. 이 소소한 행동들의 첫인상은 유쾌하고 귀엽다. 하지만 이내 곧 이 소소한 행동들은 각 인물이 그 공간과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몸부림을 최대한 절제하여 표현한 것임을 알게 된다. 첫인상이 타자화된 객관적 장면의 재현과 인지였다면 이후 재인지와 숙고 과정에서 현실에 대한 조용한 아우성이라는 이면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첫인상. 이는 하나의 스틸 이미지나 소리(효과음)를 배제한 단순한 행위의 일차적인 시각적 전달이다. 이번 전시에서 첫인상을 전달하는 창구는 너무나 명확하다. 바로 윈도우이다. 이는 작품과 관객을 물리적으로 분리시키며 물리적 차단성은 행동의 의미나 목적보다는 인물의 객관적 움직임으로서 팬시(fancy)한 잔상만을 남긴다. 재인지의 과정으로 전화되는 변곡점은 내부 전시장으로 들어서면서이다. 다수의 채널에서 더해지는 불규칙한 소리와 함께 아우성은 그 모습을 드러내며 소소한 행동은 더 이상 소소해 보이지 않게 된다. 귀엽고 가볍게만 보였던 움직임 이면에 감춰진 감정의 소용돌이인 실체도 나타난다. 유쾌하지 않은 감정의 소용돌이는 소리와 함께 공간을 채운다. 첫인상은 사라지고 지금껏 인물들이 보여준 행동은 자신을 옥죄어오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결론에 이르면서 관객, 즉 주체는 사실상 이미지에 의해 건드려진 주체의 지각과 의식 사이에서 파열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날카로우면서도 둔탁하다. 그것은 침묵 속의 아우성이다. 야릇한 모순, 떠도는 섬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언급처럼 파열, 즉 라캉(Jacques Lacan)의 언어로는 투셰(tuche), 바르트의 언어로는 푼크툼(punctum)이라 부르는 주체와 세계 그리고 내부와 외부의 혼란이 일어난 것이다.1)
벗어나려 하지만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속 몸부림의 흔적은 드로잉으로 이어진다. 연속적으로 걸린 드로잉 시리즈는 옷을 벗는 모습을 나타내는 듯 보이지만 곧 그 순서가 모호해진다. 벗는 것이 아닌 입고 있는 모습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벗어도 벗어지지 않고 입어도 입혀지지 않는 반복적 상황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인물들은 조용한 몸부림, 즉 수행을 선택한다. 수행은 구태여 한것에서 벗어나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몸부림 중에서 가장 이성적인 분출이다. 옷을 벗고 또 벗고, 나로부터 나를 낳고, 돌고 또 돌며, 던지고 또 던지는 무한반복 속에는 수행 코드가 담겨있다.
대체로 수행의 목적은 (불교적 언어로는) 세속으로부터의 해탈, 즉 정신적 정화의 최고치를 이루는 것에 있는데, 작가도 그것을 지향하는지 묻는다면 같지만, 확실히 다른 곳을 가고 있다. 손선경 작가의 작업은 종교적 색채를 갖고 있으면서 상당히 도시적이다. 반복된 행동을 통해 정신적 정화는 이루지만 그것의 최고봉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작가가 제시하는 작은 행동의 반복은 일상에서 실현 가능한 수행 샘플과 같은 것이다. 그가 접근하는 수행이 방식은 감정의 폭발 그리고 그것에 따른 감정의 완벽한 해소보다는 모니터 프레임 안, 딱 자기 공간 안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피해 주지 않는 범위만 내에서만 행하고 해소하며 그친다. 그래서 한편에 약간의 답답함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시원하고 유쾌한 한방은 없지 않은가? 조금 풀고 다시 부딪히며 나아가야 하는 삶이 현실이니 말이다.
이번 손선경 작가의 전시는 작업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 코드가 옵스큐라의 개성 있는 공간과 어우러져 이중성이 나뉘어 한 겹씩 다가오고 포개져 결과적으로는 더 극적으로 작품의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박우진(옵스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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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할 포스터, 이영욱·조주연·최연희 옮김, 『실재의 귀환』, 경성대학교 출판부, pp.212~213.
하얀 집 안에 흰 프레임의 모니터. 그리고 그 모니터 안에는 하얀 배경 속 검은 선으로 그려진 인물들이 단순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옵스큐라 윈도우를 통해 바라본 모니터 속 인물들은 각자의 공간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윈도우를 사이에 두고 바라본 인물들은 전적으로 타자에 불과하고 그 행위는 정적(靜的)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전시장 안으로 들어설수록 겹겹이 더해지는 각기 다른 소리의 층 차는 정적을 깨고 외부에서 무심하게 타인을 바라보던 시선을 삶의 한가운데로 옮겨놓는다.
손선경의 “emerge_comecomecome”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나타나는 교감의 이중적 교차는 그의 작업에서도 동일하게 진행된다. 화면 속 인물들은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삽질하며, 옷을 벗고, 어디론가 들어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등 격하지 않은 소소한 행동들을 무한히 반복한다. 이 소소한 행동들의 첫인상은 유쾌하고 귀엽다. 하지만 이내 곧 이 소소한 행동들은 각 인물이 그 공간과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몸부림을 최대한 절제하여 표현한 것임을 알게 된다. 첫인상이 타자화된 객관적 장면의 재현과 인지였다면 이후 재인지와 숙고 과정에서 현실에 대한 조용한 아우성이라는 이면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첫인상. 이는 하나의 스틸 이미지나 소리(효과음)를 배제한 단순한 행위의 일차적인 시각적 전달이다. 이번 전시에서 첫인상을 전달하는 창구는 너무나 명확하다. 바로 윈도우이다. 이는 작품과 관객을 물리적으로 분리시키며 물리적 차단성은 행동의 의미나 목적보다는 인물의 객관적 움직임으로서 팬시(fancy)한 잔상만을 남긴다. 재인지의 과정으로 전화되는 변곡점은 내부 전시장으로 들어서면서이다. 다수의 채널에서 더해지는 불규칙한 소리와 함께 아우성은 그 모습을 드러내며 소소한 행동은 더 이상 소소해 보이지 않게 된다. 귀엽고 가볍게만 보였던 움직임 이면에 감춰진 감정의 소용돌이인 실체도 나타난다. 유쾌하지 않은 감정의 소용돌이는 소리와 함께 공간을 채운다. 첫인상은 사라지고 지금껏 인물들이 보여준 행동은 자신을 옥죄어오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결론에 이르면서 관객, 즉 주체는 사실상 이미지에 의해 건드려진 주체의 지각과 의식 사이에서 파열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날카로우면서도 둔탁하다. 그것은 침묵 속의 아우성이다. 야릇한 모순, 떠도는 섬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언급처럼 파열, 즉 라캉(Jacques Lacan)의 언어로는 투셰(tuche), 바르트의 언어로는 푼크툼(punctum)이라 부르는 주체와 세계 그리고 내부와 외부의 혼란이 일어난 것이다.1)
벗어나려 하지만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속 몸부림의 흔적은 드로잉으로 이어진다. 연속적으로 걸린 드로잉 시리즈는 옷을 벗는 모습을 나타내는 듯 보이지만 곧 그 순서가 모호해진다. 벗는 것이 아닌 입고 있는 모습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벗어도 벗어지지 않고 입어도 입혀지지 않는 반복적 상황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인물들은 조용한 몸부림, 즉 수행을 선택한다. 수행은 구태여 한것에서 벗어나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몸부림 중에서 가장 이성적인 분출이다. 옷을 벗고 또 벗고, 나로부터 나를 낳고, 돌고 또 돌며, 던지고 또 던지는 무한반복 속에는 수행 코드가 담겨있다.
대체로 수행의 목적은 (불교적 언어로는) 세속으로부터의 해탈, 즉 정신적 정화의 최고치를 이루는 것에 있는데, 작가도 그것을 지향하는지 묻는다면 같지만, 확실히 다른 곳을 가고 있다. 손선경 작가의 작업은 종교적 색채를 갖고 있으면서 상당히 도시적이다. 반복된 행동을 통해 정신적 정화는 이루지만 그것의 최고봉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작가가 제시하는 작은 행동의 반복은 일상에서 실현 가능한 수행 샘플과 같은 것이다. 그가 접근하는 수행이 방식은 감정의 폭발 그리고 그것에 따른 감정의 완벽한 해소보다는 모니터 프레임 안, 딱 자기 공간 안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피해 주지 않는 범위만 내에서만 행하고 해소하며 그친다. 그래서 한편에 약간의 답답함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시원하고 유쾌한 한방은 없지 않은가? 조금 풀고 다시 부딪히며 나아가야 하는 삶이 현실이니 말이다.
이번 손선경 작가의 전시는 작업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 코드가 옵스큐라의 개성 있는 공간과 어우러져 이중성이 나뉘어 한 겹씩 다가오고 포개져 결과적으로는 더 극적으로 작품의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박우진(옵스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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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할 포스터, 이영욱·조주연·최연희 옮김, 『실재의 귀환』, 경성대학교 출판부, pp.212~213.
“마뜨로슈까 속엔 언제까지나 마뜨로슈까, 실로 반복되고 있을 뿐이지 결국엔 아무것도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있던것이 부서져서 없어진 것이 아니라, 본래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 뿐이죠.” 황정은 『백의 그림자』 중
아주 열심히 반복되는 리듬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후에 그 속에서 안도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 시스템이 지겹고 권태로워서 늘 벗어나고 싶다 라든지 이 모든걸 벗어던지고 다시 태어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다시 늘 그 제자리에 돌아와 있는 느낌이다. 삶이 반복으로 채워지고 있다. 정말이지 반복이 인생의 한 형태가 되어가고 있다. ◼️손선경
아주 열심히 반복되는 리듬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후에 그 속에서 안도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 시스템이 지겹고 권태로워서 늘 벗어나고 싶다 라든지 이 모든걸 벗어던지고 다시 태어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다시 늘 그 제자리에 돌아와 있는 느낌이다. 삶이 반복으로 채워지고 있다. 정말이지 반복이 인생의 한 형태가 되어가고 있다. ◼️손선경
손선경(1983)은 홍익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도불하여 파리 8대학에서 뉴미디어 MA를 마쳤다. OCI 미술관, 아웃사이트 등 다수의 개인전 및 그룹전에 참여하였으며, 난지(2017)와 OCI(2016) , 프랑스에 위치한 레시전시 등에 참여하였다. 현재 서울에서 작업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