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rrapolis
NARAE JIN
NARAE JIN
진나래, <How to make (Anti-)Virus Juice>, 단채널영상, 3분50초, 2020
진나래, <How to make (Anti-)Virus Juice> 메뉴판, 혼합재료, 2020
'이상한 과일 연합정당 ⓒNarae 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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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래, <이종-선언체 (Heterogeneous Manifeto-Body)>, 혼합매체 가변설치, 2020
이상한 과일 연합정당 온라인 창당대회 준비모임, 온라인 화상회의 스크린샷,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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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래, <TERRAPOLIS, 땅의 정치>, 전시 프리뷰, 옵스큐라, 2020
2019년부터 비인간 정당의 조직 및 입법 · 사법 프로젝트 "이상한 과일"을 진행해온 진나래 작가의 "TERRAPOLIS, 땅의 정치" 전시가 2020년 7월 옵스큐라에서 시작된다. 작가는 탈인본주의 시선에서 모든 생명의 권리와 공존에 대해 질문한다. 인간 외 생명이 주체로서 인정을 받기 위한 삶의 투쟁은 법안 발의, 정당 창당 등 가장 인간적이고 이성적인 언어인 정치로 나타난다. 24시간 운영되는 윈도우 공간에 설치된 <이종-선언체> 작업의 ‘이상한과일 연합정당 온라인 창당대회’ 영상은 GMO당, 알러지당, 미생물파티, 돼지당 등 이상한 과일 프로젝트에 지지표명을 한 당원들의 목소리와 몸짓을 담은 퍼포먼스이다. 이는 4월 15일, 21대 총선일. 온라인 서비스 줌(ZOOM)으로 진행한 기록 영상으로 코로나19 시대의 새로운 모임 형태와 활동의 기록물이기도 하다. 부대 행사로 7월 24일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의 저자 최유미 초청 세미나 '리드윗미(read-with-me)'와 선언 레시피 쉐어링 파티 '최초의 만찬' 퍼포먼스가 예정되어 있다.
◼️<최유미 저자초청 세미나 Lecture-Seminar with Yume Choi> 2020.7.24 5pm 전시 [TERRAPOLIS, 땅의 정치] 연계하여,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b, 2020) 저자 최유미의 강연과 세미나를 준비하였습니다. 유인원 연구를 비롯한 자연과학이 백인 남성 중심으로 구성되었음을 밝히고 타 종과의 불편한 공생에 대해 이야기한 다나 해러웨이의 ‘심포이에시스’(Sympoiesis, ‘공-작’, 또는 ‘공-산’)를 살피고, 이에 대한 최유미 연구자의 생각을 듣고 질문합니다.
◼️<"최초의 만찬" 선언레시피 쉐어링 파티 "the First Supper" Manifesto Recipe Sharing Party> 2020.7.24 6:30pm (세미나 종료 이후)
우리는 언제부터 우리의 생존을 위해 다른 존재를 관리하고 취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되었을까? 음식을 먹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어떤 존재의 생명을 유지하는 방법인 동시에 타 생명을 취하는 행위이며, 이러한 이유로 권력관계, 그리고 정치적 스탠스를 기반으로 한다. <최초의 만찬> 에서 참여자들은 인간과 인간 너머에 대한 고민을 담은 자신만의 정치적 레시피를 창안하여 공유하며, 이를 서로 나눕니다.
◼️세미나 및 파티 참여 신청
◼️<최유미 저자초청 세미나 Lecture-Seminar with Yume Choi> 2020.7.24 5pm 전시 [TERRAPOLIS, 땅의 정치] 연계하여,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b, 2020) 저자 최유미의 강연과 세미나를 준비하였습니다. 유인원 연구를 비롯한 자연과학이 백인 남성 중심으로 구성되었음을 밝히고 타 종과의 불편한 공생에 대해 이야기한 다나 해러웨이의 ‘심포이에시스’(Sympoiesis, ‘공-작’, 또는 ‘공-산’)를 살피고, 이에 대한 최유미 연구자의 생각을 듣고 질문합니다.
◼️<"최초의 만찬" 선언레시피 쉐어링 파티 "the First Supper" Manifesto Recipe Sharing Party> 2020.7.24 6:30pm (세미나 종료 이후)
우리는 언제부터 우리의 생존을 위해 다른 존재를 관리하고 취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되었을까? 음식을 먹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어떤 존재의 생명을 유지하는 방법인 동시에 타 생명을 취하는 행위이며, 이러한 이유로 권력관계, 그리고 정치적 스탠스를 기반으로 한다. <최초의 만찬> 에서 참여자들은 인간과 인간 너머에 대한 고민을 담은 자신만의 정치적 레시피를 창안하여 공유하며, 이를 서로 나눕니다.
◼️세미나 및 파티 참여 신청
◼️전시기간중 내부 관람 / 수-토 / 11:00-18:00
헌법의 내용을 보면 그 사회가 지향하는 바를 알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랑, 평화, 평등과 같은 모두에게 보편적일 것만 같은 이상적 추상어가 구체적 사례에 적용될 때 그 선(barrier)을 명확히 드러낼 수밖에 없듯, 헌법이 이상을 드러낸다면 우리는 실정법과 판결을 통해 실질적 힘의 관계를 명확히 인지한다. 그래서 우리 삶은, 아주 구체적인 상황에서 발생하는 힘의 불균형 속에서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정치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사고와 달리 현실 세계에서 마주하는 아주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사례들, 그리고 다양한 목소리들의 권리를 조정하는 정치를 통해 각 존재들은 그 위치를 확인하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재조직화한다. 비단 현실정치만이 아니라 일상, 문화, 학술, 모든 방면에서 그렇다. 주체로서 인정받지 못했던 존재들은 그 존재를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시위, 학술, 문화를 통틀어 언어를 조직해왔고, 그러한 경합들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어떤 사회에서 동등한 정치적, 사회적 주체로서 인정받는 과정은 그 주체가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으며 사회가 그 목소리를 어떻게 듣고 인정하는가와도 관련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신과는 다른 타자의 사회적 존재와 정치적 주체성, 권리를 받아들이는가? 서로 다른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따로 또 함께 살고 있는 것일까? 그 공생과 맞부딪힘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아내는 일이 과연 가능한지, 또는 불가능하다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사회가 변화하는 과정은 재현되지 못하는 이들이 목소리를 내는 과정만이 아닌, 재현되고 있는 이들이 타자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구조를 해체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주체적 발화를 하는 대상으로 인간 외 존재들을 사유하는 일은 그런 면에서 시각을 다각화함으로써 최소한의 공존을 모색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이상한 과일> 프로젝트는 인간이지만 같은 동등한 인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이들을 기억하며 이러한 관계에 대한 고민을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까지 확장해보고, 그 경합의 과정을 드러내보고자 기획한 작업이다. 흔히 우리는 동식물을 보호 또는 관리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비인간은 데모의 참여자가 될 수 없다고 보지만, 삶을 위한 투쟁의 과정이 데모이고 정치라 본다면 경합의 언어가 우리의 것과 같지 않다 그 존재들을 정치적이지 않은 존재로 규정할 수 있을까? 인간 외 종의 언어, 표현과 소통방식이 우리에게 번역, 또는 전이될 수 있다면 어떨까? 인간 외 존재들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정치해내고 있는 것일까? 외부와 구분지어진 형태로, 태어나고 죽고, 흩어지는 그런 종으로서, 서로 다른 종을 먹고 먹히는 그런 종으로서, 우리는 어떤 공생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이라는 한계를 가진 채 아주 인간적인 방식으로, 인간 외 종들의 법적-정치적 주체로서의 가능성을 다루는 비인간 '정당' 을 조직하고, 헌법을 만들고, 모의 재판을 진행하는 이 프로젝트에, 백인들에 의해 나무에 목 매달린 흑인들을 과일에 비유한 Abel Meeropol의 시를 빌어 <Strange Fruit>(이상한 과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격체가 아닌, 하지만 어딘가 살아 움직이는, 이상한 과일. 모의정당의 ‘창당’이라는 가장 희망적인 그림으로 시작한 이야기이지만 결국 어떤 것을 먹고 소화해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 사이, 입법과 사법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것은 어쩌면 가장 곤란하고 판단 불가능한 아노미 상태를 향해 치달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과정 속에서 존재론적, 인식론적 전환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그렇게 결말을 열린 채로 두고 평화와 폭력, 파괴와 연민 사이를 헤집는 여정을 떠나보고자 하였다.
◼️진나래
그러나 어떤 사회에서 동등한 정치적, 사회적 주체로서 인정받는 과정은 그 주체가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으며 사회가 그 목소리를 어떻게 듣고 인정하는가와도 관련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신과는 다른 타자의 사회적 존재와 정치적 주체성, 권리를 받아들이는가? 서로 다른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따로 또 함께 살고 있는 것일까? 그 공생과 맞부딪힘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아내는 일이 과연 가능한지, 또는 불가능하다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사회가 변화하는 과정은 재현되지 못하는 이들이 목소리를 내는 과정만이 아닌, 재현되고 있는 이들이 타자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구조를 해체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주체적 발화를 하는 대상으로 인간 외 존재들을 사유하는 일은 그런 면에서 시각을 다각화함으로써 최소한의 공존을 모색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이상한 과일> 프로젝트는 인간이지만 같은 동등한 인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이들을 기억하며 이러한 관계에 대한 고민을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까지 확장해보고, 그 경합의 과정을 드러내보고자 기획한 작업이다. 흔히 우리는 동식물을 보호 또는 관리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비인간은 데모의 참여자가 될 수 없다고 보지만, 삶을 위한 투쟁의 과정이 데모이고 정치라 본다면 경합의 언어가 우리의 것과 같지 않다 그 존재들을 정치적이지 않은 존재로 규정할 수 있을까? 인간 외 종의 언어, 표현과 소통방식이 우리에게 번역, 또는 전이될 수 있다면 어떨까? 인간 외 존재들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정치해내고 있는 것일까? 외부와 구분지어진 형태로, 태어나고 죽고, 흩어지는 그런 종으로서, 서로 다른 종을 먹고 먹히는 그런 종으로서, 우리는 어떤 공생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이라는 한계를 가진 채 아주 인간적인 방식으로, 인간 외 종들의 법적-정치적 주체로서의 가능성을 다루는 비인간 '정당' 을 조직하고, 헌법을 만들고, 모의 재판을 진행하는 이 프로젝트에, 백인들에 의해 나무에 목 매달린 흑인들을 과일에 비유한 Abel Meeropol의 시를 빌어 <Strange Fruit>(이상한 과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격체가 아닌, 하지만 어딘가 살아 움직이는, 이상한 과일. 모의정당의 ‘창당’이라는 가장 희망적인 그림으로 시작한 이야기이지만 결국 어떤 것을 먹고 소화해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 사이, 입법과 사법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것은 어쩌면 가장 곤란하고 판단 불가능한 아노미 상태를 향해 치달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과정 속에서 존재론적, 인식론적 전환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그렇게 결말을 열린 채로 두고 평화와 폭력, 파괴와 연민 사이를 헤집는 여정을 떠나보고자 하였다.
◼️진나래
복수종의 정치를 위하여: <이상한 과일 (Strange Fruit)>
여기 까마귀들이 뜯어 먹고/ 비를 모으며, 바람을 빨아들이며/
햇살에 썩어 가고, 나무에서 떨어질/ 여기 이상하고 슬픈 열매가 있다...
이것은 1939년 미국의 흑인 여가수 빌리 홀리데이가 불러서 유명해진 “이상한 과일(strange fruit)”이라는 노래의 가사다. ‘이상하고 슬픈 열매’는 교수목(hanging tree)에 목매달려 죽임을 당한 미국남부의 흑인들이다. 인터넷에서 찾은 사진에는 남루한 옷을 입은 흑인 여러 명이 교수목에 목매달려 있고, 그 나무 밑에는 많은 수의 백인 남성들과 약간의 여성들이 무심한 얼굴로 그들을 가리키면서 구경하고 있다. 마치 죽어 마땅한 자들이 매달려 있다는 듯이 그들의 얼굴은 끔찍하게 아무렇지도 않다. 저들은 어떻게 저토록 무심한 얼굴일 수 있을까? 그들에게 교수목에 매달린 흑인들은 같은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 매달린 자들은 채찍을 내리쳐도 되고, 반항하면 목매달아 죽여도 되는 자들, 서양인들을 위해 죽어라 일만 하기로 되어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인종주의적인 폭력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흑인만이 아니었다. 마녀로 몰린 여성들, 아메리카 대륙의 토착민들, 아시아인들, 유태인들이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되었다.
지금도 인종주의는 여전하다. 하지만 지금은 지난 세기까지 횡횡했던 노골적인 인종주의적 폭력은 범죄시 되고 있다. 페미니즘, 흑인해방운동, 반식민운동 등 끊임없는 정치투쟁의 결과다. 하지만 이런 인종주의와 유비적으로 보이는 폭력은 아직 여전하다. 그것은 비인간 생명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다. 진나래 작가는 빌리 홀리데이의 이 노래를 기억하면서 ‘이상하고 슬픈 열매’를 비인간 생명으로 확장시킨다. <이상한 과일> 프로젝트는 비인간 생명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문제를 정치의 장 속으로 가져오는 작업이다. 비인간인 이들을 정치의 장으로 데리고 오는 일은 어렵다. 행위자로서의 인간과 행위를 받기만 하는 자로서 비인간이라는 통념에 의해 이들 사이의 존재론적 위계가 설정되기 때문이다. 서양문화에서 이들의 존재론적 위계는 살해와 죽이기의 구분에서 드러난다.
인간은 복수를 위하여, 혹은 정치적인 이유로, 혹은 전쟁에서 같은 인간에 의해 ‘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음식을 위해 ‘죽을’ 수는 없다. 반면 동물은 살해당할 수 없고, 음식을 위하여 죽임을 당할 수 있을 뿐이다.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은 신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천사가 나타나 그것을 중단시켰다. 이에 아브라함은 이삭 대신 숫양을 희생으로 바쳤다. 인간은 희생제의 음식으로 바쳐질 수 없다. 임마뉴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윤리학의 제1 계율인 “죽이지 말라”는 인간만 해당 되는 이야기였다.
영화 <양들의 침묵>은 이런 계몽담론 전체에 대한 깊은 불신을 드러낸다.1) 정신병원에 결박당한 채 갇혀있는 정신과 의사인 렉터는 자신의 환자들을 죽이고 요리해서 먹었다. 희생의 대리를 믿지 않는 그의 논리는 이렇다; ‘나는 동물을 먹는다. 그러므로 인간도 먹는다.’ 렉터는 인간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에 대한 분리, 깨끗한 인간의 양심을 모두 의심하면서 엽기적인 행각으로 그것의 허구성을 까발리고 조롱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생명들에게 ‘죽이기’ 없는 ‘삶’이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누군가의 고통을 먹고 사는 자들이다.
진나래 작가는 레비나스의 윤리학 “죽이지 말라”의 허구성을 포착한다. 그러나 렉터처럼 어떤 윤리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채택하려는 윤리학은 “죽일 수 있다고 여기지 말라”이다. 이는 레비나스의 윤리학에 반대하면서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가 제시한 것이다.2) “죽이지 말라”와 “죽일 수 있다고 여기지 말라”는 비슷한 것 같지만 아주 다른 말이다. 전자는 죽여도 되는 대상들이 전제되어야 지킬 수 있는 계율인 반면, 후자는 죽여도 되는 대상을 지정하는 것을 금지하는 계율이다. 전자는 죽이기의 죄를 회피할 공간을 따로 마련해 두지만, 후자는 그 공간을 따로 마련해 두지 않는다. 누구도 죽이기의 죄를 회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엇도/누구도 죽일 수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누구도 죽이기의 죄를 회피할 수 없는 것은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에 기댐으로서만, 그 생을 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모든 생명은 존재론적으로 평등하다. 약육강식이 자연의 섭리라고들 생각하지만 그것은 진실의 한 단면일 뿐이다. 약자들의 몸에 기대 살아가는 강자들은 그들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철저하게 일방적인 관계로 직행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복수종 생명들 사이 정치가 가능해진다. 불평등한 권력 관계 속에 내재해 있는 상호 의존성이 이들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만든다. 이들의 정치 덕분에 강자의 무한정한 권력이 제한되고, 각자의 한정된 풍요를 추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 날의 지구는 복수종 생명들의 오랜 정치의 구축물이다. 우리는 이를 테라 폴리스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들을 진화의 가지 맨꼭대기를 차지하는 특별한 생물종으로 여긴 탓에 정치력이 급격히 쇠퇴하였다. 인간예외주의는 이제 서구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구 대부분의 지역이 서구화되고, 그곳은 예외없이 인간예외주의가 기승을 부린다. 그런데 인간들이 처음부터 비인간을 통치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아직도 지구 곳곳에 남아있는 토착민족들의 문화는 복수종과의 정치적인 관계를 계승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이들의 정치를 계승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진나래 작가는 ‘모든 생명을 위한 정당’을 창당하려고 한다. 이 창당활동의 의의는 모든 생명의 관계가 정치적인 것임을 천명하는 데 있다. 우리는 창당과 법안 발의를 통해 잃어버린 복수종의 정치를 다시 복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모든 생명을 위한 정당’을 비인간을 대리(representation)하려는 정당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대리의 정치는 그 대리 대상의 후견인이 되어서 대신 정치를 하겠는 것이다. 후견인에게 가장 좋은 대리 대상은 말없는 자연일 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입장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상대의 입장이 되겠다고 이야기 한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모든 생명을 위한 정당’은 이 불가능성을 가능한 것으로 꾸며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생명을 위한 정당’은 ‘누구/무엇’을 위한 정당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비인간과 인간의 반려관계를 위한 정당이어야 한다. 정당의 참여자들은 비인간들의 후견인으로서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참여자들은 비인간의 반려로서 그들과의 중요한 타자성(significant otherness)3)를 육성하는 정치를 복원하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해러웨이의 개념인 ‘중요한 타자성’은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관계의 윤리를 함축한다. 상대를 중요한 타자로 대한다는 것은, 둘도 없이 소중하지만 결코 나에게 포섭되지 않는 그의 현저한 타자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정당의 중요한 일 중 하나는 법안 발의다. 법안을 발의하는 문제에서 비인간이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인들 무슨 근거로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권리는 어떤 정체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나온다. 관계이전에 파트너가 있을 리 없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어떻게 상대와 권리관계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발의되는 법안들은 비인간의 권리를 인간이 대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과 인간의 권리관계를 주장하고, 보호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는 절합(articulation)의 정치다. 정체성에 근거한 권리를 따진다면, 필시 대리의 정치로 접근하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소위 전문가들이 객관성을 표방하면서 경찰적인 권력을 행사한다. 이때 배제되는 자들은 이해 당사자다. 가령, 실험동물 문제에서 과학자, 대학원생, 테크니션들은 이해당사자이므로 배제되고, 생명윤리학자가 실험동물을 대리한다. 그러나 이해 당사자들이야 말로, 노동하는 실험동물과 정치적인 관계에 있는 자들이고, 무엇이 그들의 고통을 유발하는지, 어떤 경우에 그것을 경감시킬 수 있는지, 다른 방법은 없는지를 알 수 있는 자들이다. 절합의 정치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무엇과 무엇을 연결하고 무엇과는 단절할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실험동물의 파트너들은 그들의 파트너들에 대한 노동착취를 방지할 법을 발의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을 긍휼히 여겨서가 아니다. 상대를 잘 보살피지 않으면서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일을 잘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연결도 항구적인 평화를 보장하지 않는다. 법에 의해 실험동물의 노동환경을 많이 개선할 수 있지만, 실험당하는 쪽은 인간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인간과 인간의 덜 폭력적인 관계를 위한 법들은 꼭 필요하지만, 그것으로 폭력이 종결되는 것은 아니다. 법은 금방 틈을 드러낼 것이다. <이상한 과일> 프로젝트는 이 실패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 작업은 어쩌면 법에서 삐져나온 자들,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자들의 문제일 것이다. 애매모호한 문제들은 법적인 다툼을 통해 다시 논쟁하고, 또 입법하고, 실패하고, 또 다시 논쟁하고, 입법하고.... 이렇게 절합의 정치는 결코 종결될 수 없다.
◼️최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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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Donna Haraway, Manifestly Haraway, Duke University Press (2016),pp.230-232
2)Donna Haraway, When Species Meet, University of Minnesota (2008), pp. 77-82
3)Donna Haraway, Companion Species Manifesto: Dogs, People, and Significant Otherness Prickly Paradigm Press (2003)
여기 까마귀들이 뜯어 먹고/ 비를 모으며, 바람을 빨아들이며/
햇살에 썩어 가고, 나무에서 떨어질/ 여기 이상하고 슬픈 열매가 있다...
이것은 1939년 미국의 흑인 여가수 빌리 홀리데이가 불러서 유명해진 “이상한 과일(strange fruit)”이라는 노래의 가사다. ‘이상하고 슬픈 열매’는 교수목(hanging tree)에 목매달려 죽임을 당한 미국남부의 흑인들이다. 인터넷에서 찾은 사진에는 남루한 옷을 입은 흑인 여러 명이 교수목에 목매달려 있고, 그 나무 밑에는 많은 수의 백인 남성들과 약간의 여성들이 무심한 얼굴로 그들을 가리키면서 구경하고 있다. 마치 죽어 마땅한 자들이 매달려 있다는 듯이 그들의 얼굴은 끔찍하게 아무렇지도 않다. 저들은 어떻게 저토록 무심한 얼굴일 수 있을까? 그들에게 교수목에 매달린 흑인들은 같은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 매달린 자들은 채찍을 내리쳐도 되고, 반항하면 목매달아 죽여도 되는 자들, 서양인들을 위해 죽어라 일만 하기로 되어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인종주의적인 폭력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흑인만이 아니었다. 마녀로 몰린 여성들, 아메리카 대륙의 토착민들, 아시아인들, 유태인들이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되었다.
지금도 인종주의는 여전하다. 하지만 지금은 지난 세기까지 횡횡했던 노골적인 인종주의적 폭력은 범죄시 되고 있다. 페미니즘, 흑인해방운동, 반식민운동 등 끊임없는 정치투쟁의 결과다. 하지만 이런 인종주의와 유비적으로 보이는 폭력은 아직 여전하다. 그것은 비인간 생명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다. 진나래 작가는 빌리 홀리데이의 이 노래를 기억하면서 ‘이상하고 슬픈 열매’를 비인간 생명으로 확장시킨다. <이상한 과일> 프로젝트는 비인간 생명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문제를 정치의 장 속으로 가져오는 작업이다. 비인간인 이들을 정치의 장으로 데리고 오는 일은 어렵다. 행위자로서의 인간과 행위를 받기만 하는 자로서 비인간이라는 통념에 의해 이들 사이의 존재론적 위계가 설정되기 때문이다. 서양문화에서 이들의 존재론적 위계는 살해와 죽이기의 구분에서 드러난다.
인간은 복수를 위하여, 혹은 정치적인 이유로, 혹은 전쟁에서 같은 인간에 의해 ‘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음식을 위해 ‘죽을’ 수는 없다. 반면 동물은 살해당할 수 없고, 음식을 위하여 죽임을 당할 수 있을 뿐이다.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은 신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천사가 나타나 그것을 중단시켰다. 이에 아브라함은 이삭 대신 숫양을 희생으로 바쳤다. 인간은 희생제의 음식으로 바쳐질 수 없다. 임마뉴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윤리학의 제1 계율인 “죽이지 말라”는 인간만 해당 되는 이야기였다.
영화 <양들의 침묵>은 이런 계몽담론 전체에 대한 깊은 불신을 드러낸다.1) 정신병원에 결박당한 채 갇혀있는 정신과 의사인 렉터는 자신의 환자들을 죽이고 요리해서 먹었다. 희생의 대리를 믿지 않는 그의 논리는 이렇다; ‘나는 동물을 먹는다. 그러므로 인간도 먹는다.’ 렉터는 인간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에 대한 분리, 깨끗한 인간의 양심을 모두 의심하면서 엽기적인 행각으로 그것의 허구성을 까발리고 조롱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생명들에게 ‘죽이기’ 없는 ‘삶’이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누군가의 고통을 먹고 사는 자들이다.
진나래 작가는 레비나스의 윤리학 “죽이지 말라”의 허구성을 포착한다. 그러나 렉터처럼 어떤 윤리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채택하려는 윤리학은 “죽일 수 있다고 여기지 말라”이다. 이는 레비나스의 윤리학에 반대하면서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가 제시한 것이다.2) “죽이지 말라”와 “죽일 수 있다고 여기지 말라”는 비슷한 것 같지만 아주 다른 말이다. 전자는 죽여도 되는 대상들이 전제되어야 지킬 수 있는 계율인 반면, 후자는 죽여도 되는 대상을 지정하는 것을 금지하는 계율이다. 전자는 죽이기의 죄를 회피할 공간을 따로 마련해 두지만, 후자는 그 공간을 따로 마련해 두지 않는다. 누구도 죽이기의 죄를 회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엇도/누구도 죽일 수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누구도 죽이기의 죄를 회피할 수 없는 것은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에 기댐으로서만, 그 생을 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모든 생명은 존재론적으로 평등하다. 약육강식이 자연의 섭리라고들 생각하지만 그것은 진실의 한 단면일 뿐이다. 약자들의 몸에 기대 살아가는 강자들은 그들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철저하게 일방적인 관계로 직행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복수종 생명들 사이 정치가 가능해진다. 불평등한 권력 관계 속에 내재해 있는 상호 의존성이 이들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만든다. 이들의 정치 덕분에 강자의 무한정한 권력이 제한되고, 각자의 한정된 풍요를 추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 날의 지구는 복수종 생명들의 오랜 정치의 구축물이다. 우리는 이를 테라 폴리스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들을 진화의 가지 맨꼭대기를 차지하는 특별한 생물종으로 여긴 탓에 정치력이 급격히 쇠퇴하였다. 인간예외주의는 이제 서구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구 대부분의 지역이 서구화되고, 그곳은 예외없이 인간예외주의가 기승을 부린다. 그런데 인간들이 처음부터 비인간을 통치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아직도 지구 곳곳에 남아있는 토착민족들의 문화는 복수종과의 정치적인 관계를 계승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이들의 정치를 계승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진나래 작가는 ‘모든 생명을 위한 정당’을 창당하려고 한다. 이 창당활동의 의의는 모든 생명의 관계가 정치적인 것임을 천명하는 데 있다. 우리는 창당과 법안 발의를 통해 잃어버린 복수종의 정치를 다시 복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모든 생명을 위한 정당’을 비인간을 대리(representation)하려는 정당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대리의 정치는 그 대리 대상의 후견인이 되어서 대신 정치를 하겠는 것이다. 후견인에게 가장 좋은 대리 대상은 말없는 자연일 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입장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상대의 입장이 되겠다고 이야기 한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모든 생명을 위한 정당’은 이 불가능성을 가능한 것으로 꾸며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생명을 위한 정당’은 ‘누구/무엇’을 위한 정당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비인간과 인간의 반려관계를 위한 정당이어야 한다. 정당의 참여자들은 비인간들의 후견인으로서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참여자들은 비인간의 반려로서 그들과의 중요한 타자성(significant otherness)3)를 육성하는 정치를 복원하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해러웨이의 개념인 ‘중요한 타자성’은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관계의 윤리를 함축한다. 상대를 중요한 타자로 대한다는 것은, 둘도 없이 소중하지만 결코 나에게 포섭되지 않는 그의 현저한 타자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정당의 중요한 일 중 하나는 법안 발의다. 법안을 발의하는 문제에서 비인간이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인들 무슨 근거로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권리는 어떤 정체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나온다. 관계이전에 파트너가 있을 리 없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어떻게 상대와 권리관계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발의되는 법안들은 비인간의 권리를 인간이 대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과 인간의 권리관계를 주장하고, 보호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는 절합(articulation)의 정치다. 정체성에 근거한 권리를 따진다면, 필시 대리의 정치로 접근하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소위 전문가들이 객관성을 표방하면서 경찰적인 권력을 행사한다. 이때 배제되는 자들은 이해 당사자다. 가령, 실험동물 문제에서 과학자, 대학원생, 테크니션들은 이해당사자이므로 배제되고, 생명윤리학자가 실험동물을 대리한다. 그러나 이해 당사자들이야 말로, 노동하는 실험동물과 정치적인 관계에 있는 자들이고, 무엇이 그들의 고통을 유발하는지, 어떤 경우에 그것을 경감시킬 수 있는지, 다른 방법은 없는지를 알 수 있는 자들이다. 절합의 정치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무엇과 무엇을 연결하고 무엇과는 단절할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실험동물의 파트너들은 그들의 파트너들에 대한 노동착취를 방지할 법을 발의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을 긍휼히 여겨서가 아니다. 상대를 잘 보살피지 않으면서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일을 잘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연결도 항구적인 평화를 보장하지 않는다. 법에 의해 실험동물의 노동환경을 많이 개선할 수 있지만, 실험당하는 쪽은 인간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인간과 인간의 덜 폭력적인 관계를 위한 법들은 꼭 필요하지만, 그것으로 폭력이 종결되는 것은 아니다. 법은 금방 틈을 드러낼 것이다. <이상한 과일> 프로젝트는 이 실패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 작업은 어쩌면 법에서 삐져나온 자들,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자들의 문제일 것이다. 애매모호한 문제들은 법적인 다툼을 통해 다시 논쟁하고, 또 입법하고, 실패하고, 또 다시 논쟁하고, 입법하고.... 이렇게 절합의 정치는 결코 종결될 수 없다.
◼️최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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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Donna Haraway, Manifestly Haraway, Duke University Press (2016),pp.230-232
2)Donna Haraway, When Species Meet, University of Minnesota (2008), pp. 77-82
3)Donna Haraway, Companion Species Manifesto: Dogs, People, and Significant Otherness Prickly Paradigm Press (2003)
진나래(1983b)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사와 대학원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이후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 석박통합과정을 수료하였다. ‘사이’의 조각, 관계의 조각을 고민하며 주로 ‘컷 앤 페이스트 글쓰기(cut-and-paste writing)’의 방식으로 진실과 허구 사이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존재방식에 관해 작업해왔으며, 2012년 아트콜렉티브 ETC(Enterprise of Temporary Consensus)를 결성하여 도시에 비일상적 방식으로 개입하는 활동들을 다년간 해왔다. 이후 타자와의 관계맺기에 대한 관심이 인간과 자연, 인간과 비인간 이분법을 넘어 존재하기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주요 전시와 프로젝트로는 “작가P의 재구성”(인천아트플렛폼 갤러리, 인천, 2016), “원도심 탐구생활”(제주문화예술센터 이아, 제주, 2017), “Simulacra2, Galleri54, (예테보리, 스웨덴, 2018), “이상한 과일 #1 : 태양은 빛나고 우린 모두 꿈을 꾸네”(KAIST경영대학 SUPEX갤러리, 서울, 2019) 등이 있으며 경기창작센터(2013), 국립현대미술관 창동창작스튜디오(2013), ZK/U(Center for Art and Urbanistik, 독일 베를린, 2014, 2016), 국립아시아문화전당 ACC R(2020)등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더불어 “경기북부 DMZ내일밥상”(2019), “예술가의 런치박스”(서울시립미술관, 2018), “실향민공유밥상”(경기문화재단 북부문화사업단, 2018) 등의 기획 활동도 하고 있다.
주요 전시와 프로젝트로는 “작가P의 재구성”(인천아트플렛폼 갤러리, 인천, 2016), “원도심 탐구생활”(제주문화예술센터 이아, 제주, 2017), “Simulacra2, Galleri54, (예테보리, 스웨덴, 2018), “이상한 과일 #1 : 태양은 빛나고 우린 모두 꿈을 꾸네”(KAIST경영대학 SUPEX갤러리, 서울, 2019) 등이 있으며 경기창작센터(2013), 국립현대미술관 창동창작스튜디오(2013), ZK/U(Center for Art and Urbanistik, 독일 베를린, 2014, 2016), 국립아시아문화전당 ACC R(2020)등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더불어 “경기북부 DMZ내일밥상”(2019), “예술가의 런치박스”(서울시립미술관, 2018), “실향민공유밥상”(경기문화재단 북부문화사업단, 2018) 등의 기획 활동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