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멍 The Hole
김남표 Nampyo Kim
김남표 Nampyo Kim
Nampyo Kim, PM5 #2, 2024, Oil on canvas, 145.5x112.1cm
Nampyo Kim, PM5 #1, 2024, Oil on canvas, 145.5x112.1cm
Nampyo Kim, PM5 #5, 2024, Oil on canvas, 150x228.5cm
Nampyo Kim, PM5 #6, 2024, Water color on paper, 190x140cm
L. Nampyo Kim, PM5(s) #6, 2024, Oil on canvas, 45.5x37.9cm
R. Nampyo Kim, PM5(s) #5, 2024, Oil on canvas, 38x38cm
R. Nampyo Kim, PM5(s) #5, 2024, Oil on canvas, 38x38cm
L. Nampyo Kim, PM5(s) #1, 2024, Oil on canvas, 30.5x24cm
R. Nampyo Kim, PM5(s) #2, 2024, Oil on canvas, 30.5x24cm
R. Nampyo Kim, PM5(s) #2, 2024, Oil on canvas, 30.5x24cm
Nampyo Kim, PM5(s) #4, 2024, Oil on canvas, 37.9x45.5cm
L. Nampyo Kim, PM5(s) #3, 2024, Oil on canvas, 30.5x24cm
R. Nampyo Kim, PM5(s) #8, 2024, Oil on canvas, 14x18cm
R. Nampyo Kim, PM5(s) #8, 2024, Oil on canvas, 14x18cm
Nampyo Kim, Drawings, 2024
구 멍, Installation in Obscura, 2024
옵스큐라는 뛰어난 회화적 표현력과 독창적인 판타지로 국-내외에서 주목 받는 김남표의 “구멍” 전시를 오는 5월 3일 개최한다. 회화, 그리는 행위의 근본적 실체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이번 전시는 견고함의 파괴, 대상화된 신체 그리고 파편적 기록으로 구성된 60여점의 신작을 선보인다.
구멍은 뚫어지거나 파낸 자리, 어려움을 헤쳐 나갈 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허점이나 약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존재와 실체가 비어 있는, 비어진 상태이다. 기존 회화에 구멍을 내고 내부를 헤집으며 실체를 비우는 행위는 작가에게는 근본적 존재를 들여다 보는 일이다. 전시 “구멍”은 김남표의 회화적 실체의 민 낯을 스스로 밝힌다. 그는 이번 작업에 대해 ‘오후 5시’, ‘섹슈얼리티(sexuality)’, ‘리얼리티(reality)와 논-리얼리티(non-reality)’ 몇개의 주요 코드를 작업기록 인스타그램 계정(@nampyok2)에서 밝히고 있다. 이 코드들로 인해 잠재되었던 내면의 취향과 의식은 규칙 없이 날것으로 처절하게 드러난다. 그의 결과물은 처참하고 불쾌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름다운 색의 잔상이 남아있다.
비평가 최정우는 “구멍이 불가능한 좌표, 화화의 불확정적 부표 – 김남표 작가의 오후 5시에 부치는 미학적 정신분석” 글을 통해 김남표의 회화적 결단과 행위의 이유에 대하여 다층적인 맵핑을 제안한다. 최정우는 “화가는 언제 그리는가. 이 물음은 ‘왜’라는 이유나 ‘어떻게’라는 방법을 묻지 않고 오직 회화가 그려지는 때를 묻는다.”라고 언급하며 김남표 작업에 끝없이 질문한다. 그의 글은 감각의 회화, 탈 언어, 구상과 추상의 존재와 부재, 비가시성과 가시성, 비시간성과 초시간성 등 9개의 챕터로 나뉘어 서술되는데 이는 김남표가 “구멍” 전시에서 선보이는 드로잉의 적층과 같은 구성이다. 김남표의 회화와 최정우의 글의 호응은 전시 기획의 주요 요소로 주목된다.
영화, VR 등으로 매체적 확장을 추구하며 동시에 실제 경험으로 회화적 내적 확장을 지속해온 김남표 작가에게 "구멍" 전시는 새로운 이미지 확장에 주요 지점이 될 것이다. 전시는 5월 25일까지. ◼️옵스큐라
구멍은 뚫어지거나 파낸 자리, 어려움을 헤쳐 나갈 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허점이나 약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존재와 실체가 비어 있는, 비어진 상태이다. 기존 회화에 구멍을 내고 내부를 헤집으며 실체를 비우는 행위는 작가에게는 근본적 존재를 들여다 보는 일이다. 전시 “구멍”은 김남표의 회화적 실체의 민 낯을 스스로 밝힌다. 그는 이번 작업에 대해 ‘오후 5시’, ‘섹슈얼리티(sexuality)’, ‘리얼리티(reality)와 논-리얼리티(non-reality)’ 몇개의 주요 코드를 작업기록 인스타그램 계정(@nampyok2)에서 밝히고 있다. 이 코드들로 인해 잠재되었던 내면의 취향과 의식은 규칙 없이 날것으로 처절하게 드러난다. 그의 결과물은 처참하고 불쾌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름다운 색의 잔상이 남아있다.
비평가 최정우는 “구멍이 불가능한 좌표, 화화의 불확정적 부표 – 김남표 작가의 오후 5시에 부치는 미학적 정신분석” 글을 통해 김남표의 회화적 결단과 행위의 이유에 대하여 다층적인 맵핑을 제안한다. 최정우는 “화가는 언제 그리는가. 이 물음은 ‘왜’라는 이유나 ‘어떻게’라는 방법을 묻지 않고 오직 회화가 그려지는 때를 묻는다.”라고 언급하며 김남표 작업에 끝없이 질문한다. 그의 글은 감각의 회화, 탈 언어, 구상과 추상의 존재와 부재, 비가시성과 가시성, 비시간성과 초시간성 등 9개의 챕터로 나뉘어 서술되는데 이는 김남표가 “구멍” 전시에서 선보이는 드로잉의 적층과 같은 구성이다. 김남표의 회화와 최정우의 글의 호응은 전시 기획의 주요 요소로 주목된다.
영화, VR 등으로 매체적 확장을 추구하며 동시에 실제 경험으로 회화적 내적 확장을 지속해온 김남표 작가에게 "구멍" 전시는 새로운 이미지 확장에 주요 지점이 될 것이다. 전시는 5월 25일까지. ◼️옵스큐라
나의 그림에 구멍이 났다
나의 작업에 구멍이 열렸다.
나의 견고한 그림이 구멍을 만들어 냈다.
나의 감각이 스스로 분열을 일으킨 구멍이다.
나는 구멍을 들여다 본다.
구멍이 작을 수록 탐이난다.
◼️김남표
나의 작업에 구멍이 열렸다.
나의 견고한 그림이 구멍을 만들어 냈다.
나의 감각이 스스로 분열을 일으킨 구멍이다.
나는 구멍을 들여다 본다.
구멍이 작을 수록 탐이난다.
◼️김남표
구멍의 불가능한 좌표, 회화의 불확정적 부표― 김남표 작가의 오후 5시에 부치는 미학적 정신분석
1. 화가는 언제 그리는가. 이 물음은 ‘왜’라는 이유나 ‘어떻게’라는 방법을 묻지 않고 오직 회화가 그려지는 때를 묻는다. 그럴 때, 회화는 무엇을 그리는가, 혹은 그리지 않는가. 이 물음의 방점 또한 ‘무엇’이라는 대상의 의문사가 아니라 차라리 ‘그런가’ 혹은 ‘아닌가’라는 긍정문과 부정문 사이의 선택지에 찍혀 있다. 내가 김남표 작가의 작업을 둘러싸고서 대답되지 않는―혹은 묻는 동시에 끝없이 대답되고 있는―질문의 형태로 쓰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간 아닌 시간과 결정 없는 결정에 관한 파편들이 될 것이며, 또한 그 파편들을 가능하게 한 구멍의 불가능성에 관한 하나의 정신분석이 될 것이다. 이 파편들을 그릴 수 있을까, 혹은, 예견하며 비껴가자면, 그 파편들이 파놓거나 그 파편들을 만들어놓은 구멍을 그릴 수 있을까. 그래서 이는 다시금 하나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이 된다. 회화의 (불)가능성. 아마도 혹은 절대로, 알아볼 수 없게 산산이 조각난 몸 위에서라야 비로소 뜨이는 눈의 모습으로(눈은 하나의 구멍이다), 그러나 또한 그렇게 흩어져서는 다시 스스로 이을 수 없는 것들을 이어 붙이는 기이한 기관들의 메아리 없는 외침을 매순간 처음처럼 듣는 귀의 모습으로(귀 역시 또 다른 구멍이다). 그 구멍의 시각은 오후 5시, 저 눈은 시침이 도달한 곳을 바라보고, 그때 저 귀는 분침이 정각으로 넘어가는 소리를 듣는다.
2. 구멍은 실체가 아니라 실체를 만들어내는 빈칸이다. 흐릿하고 어두운 빈칸은 색채와 형상이라는 시각적 실체의 조건이다. 흩어지는 색채 속에서, 그와 함께 흐려지는 것은 형상일 뿐만 아니라 음향이기도 하다. 분명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 형태가 흐려지는 지점에서, 문득 그와 동시에 사라지고 있는 것은 들려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 소리이다. 감각은 의식에 대한 배신이다. 그리고 그 배신을 끝없이 의식하며 그럼에도 오로지 감각으로 그려내야 하는 것이 다름 아닌 회화의 운명이다. 왜냐하면 감각은 바로 그러한 의식에 대한 배신을 통해 태어나며, 다시 그러한 감각에 대한 배신이 또 다른 사유를 낳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회화는 감각의 사유, 사유의 감각이 지닐 수 있는 운명적 내용‐형식이다. 회화가 다룰 수 있으며 또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 영역이란, 어쩌면 바로 이러한 배신의 영역, 의식과 감각과 사유가 끝없이 서로 충돌하는 어떤 몸 안일/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회화가 그 눈먼 눈의 헛된 시각으로 포착하고자 하는 것은, 그 끝없는 실패의 예감 속에서 거꾸로 자신의 귀머거리 귀로 더욱 분명히 듣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저 명멸하는 침묵의 소리, 가시적 형태의 형해가 도리어 더욱 분명한 윤곽을 만들어내는 어떤 비가시성이다. 헤매듯 사라져가는 소리들이 역설적으로 바로 그 소리들의 부재인 침묵 속에서 들려오듯이, 보이지 않게 흐려져 가는 부재의 형태가 바로 그 흩어짐 속에서 뿌연 연기처럼 분명한 존재로 드러난다. 회화는 그래서 연기이자 덩어리이다. 우리는 흔히 연기의 존재를 그저 흐리거나 불분명하다고 말하지만, 마치 그 연기의 존재 자체는 피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하나의 뚜렷하고 분명한 것이듯. 그래서 추상이 구상을 먹어버린 듯 보이는 지점에서, 구상이 추상으로 점차적으로 대체되어가거나 추상이 구상을 불현듯 출현시키는 듯 보이는 화면 속에서, 그렇게 침묵의 소리가, 구분할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마치 화면 밖으로 흘러나온 축축한 혀처럼, 화면 옆으로 삐져나온 뒤틀린 귀처럼, 하나의 시각적 청각으로 놓여 있다. 그렇게 회화는 연기이자 덩어리로서 하나의 구멍이 되며, 그 구멍은 입처럼 벌어져 목과 귀와 코와 성기 등의 다른 구멍의 기관들로 변용한다, 먹거나 마시는 기관이었던 입은 그렇게 위상기하학적(topologique)으로 변형되어 더 이상 입이 아닌 또 다른 구멍들, 무엇보다/무엇이나 보는 즉시 빨아들이는 응시의 희뿌연 고글, 먹는 즉시 흘러내리는 분비의 꽉 막힌 샤워기, 듣는 즉시 귀에 걸어서는, 삼키던 입을 막고 냄새 맡던 코를 가려 아예 못 쓰게 만들어버리고 전혀 다른 기관들로 바꿔버리는 닳아빠진 마스크,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즉시 넘쳐흐르는 침묵을 송출하는 망가진 스피커가 된다. 거기에 그렇게 부재하며 존재하는 구멍이 있다. 회화는 이러한 부재와 존재 사이의 틈, 그 구멍의 전장이다.
3. 무엇보다, 구멍은 보이지 않는다. 구멍은 비가시성의 가시화이다. 회화는 그 구멍을 그릴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구멍이 거기에 있음을 알고 있다. 그렇게 안다고 생각하고, 안다고 느낀다. 하나의 근본적 역설이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을 오직 보이는 것을 통해 그려내야 하는 것은 어쩌면 회화의 끈질긴 운명, 고질적 행운, 짜릿한 천형이다. 그렇기에 회화는 그 구멍을 그릴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통해서만 역설적으로 비로소 가능해지는, 그 자체가 하나의 구멍이 되는 내용이자 동시에 형식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회화는 그 구멍을 그릴 수 없지만, 그렇게 그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내용‐형식이 될 수 있다. 그 보이지 않는 것이란 역사적으로나 미학적이거나 종교적으로, 때로는 진리, 때로는 힘, 때로는 무(無) 또는 공(空), 때로는 구조나 주제, 의미나 방향 또는 감각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다. 이 이름들은 바로 그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보고자 붙인 명칭들, 곧 그 보이지 않는 심해의 것들을 어떻게든 붙잡으려고 흔들리는 수면 위에 우리가 가까스로 띄워놓은 부표들이다. 그래서 또 다시 한 번, 근본적으로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그것들을 사유하거나 감각할 수 있는 기관들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부재를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부정의 기관들을 갖고 있는 존재, 바로 그 부재를 느낄 수 있는 존재, 오직 부재를 통해서만 구멍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는 역설의 행위자/감지자이다. 우리 존재의 예술적 비극성, 아니 차라리 우리가 행하고 향유하며 고통 받고 있는 비극적 예술성이 바로 이러한 부재의 존재라는 우리 존재/부재의 특질에서 기인한다. 회화를 포함한 예술이 출발해서 되돌아가고 그럼에도 귀환하지 못한 채 뒤집어져 난파하지만 끝끝내 다시 출항을 감행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 지점의 부재를 감각하고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우리 자체가 하나의 구멍인 기관 전체이다. 회화는 이러한 우리 존재의 구멍이 통행하는 길이다. 이 길은 그 스스로 하나의 기관이 됨으로써 신체를 낳고 다시금 그 신체는 이전에 없었던 기관들을 분화시킨다. 신체는 분화된 기관 이전에, 그러한 기관 없이, 바로 그 기관들 자체를 하나의 부분임과 동시에 하나의 전체로서 매순간 창출하고 그렇게 전 존재가 그 기관 자체가 됨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신체가 된다. 회화는 이러한 신체와 기관들의 해부도이다. 우리는 우리 자체가 이미 해부된 몸으로서 바로 이 해부도로서의 회화 앞에 서 있다.
4. 흔히 회화는 사태에 대한 다른 시각, 곧 세계에 관한 뒤집힌 관점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뒤집히는 것은 시각이나 관점이 아니라 신체 자체이다. 신체의 시각이 물리적으로 뒤집히지 않는다면 정신적으로만 뒤집히는 관점의 전복은 이론으로만 머무를 수 있다. 이론으로만 머문다는 것이 딱히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예술로서의 회화는 단지 이론적으로만 미학적인 것이 아니라 그를 넘어선 어떤 ‘윤리적’인 것을 요구한다. 윤리적인 것이란 도덕적인 것과는 다르다. 윤리(éthos)는 단순한 미학적 감상을 넘어 어떤 결단과 행동을 요구하는 무엇, 그래서 다시금 그 진정하고 근본적인 의미에서 가장 윤리적(éthique)이고 가장 미학적(esthétique)인 것이 되는 무엇이다. 그래서 회화는 우리 신체의 뒤집힘을 요구한다. 뒤집히는 것은 신체 그 자신이어야 한다. 그렇게 뒤집힌 신체는 그때서야 비로소 사태를 똑바로 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 바로 서 있었던가 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공존하는 시간 없는 시간의 물음과 함께. 사태의 본질 자체가 원래부터 뒤집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형상이란 단지 그것이 형상처럼 보이는 것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곧 형상이라는 것이 바로 형상의 불가능성 자체를 자신의 토대이자 근본조건으로 삼고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했다는 사실을 감지하는 순간, 그 형상은 비로소 형상이 된다. 뒤집힌 신체가 비로소 바로 선 형상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보이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의 보이지 않는 성격, 바로 그 불가능성 위에 물구나무를 설 때 그 비가시성이 하나의 가시성으로 포착된다. 회화가 그리는 ‘언제’는 바로 이러한 변증법의 시간이다. 나의 첫 물음이 ‘언제’라는 때를 물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 ‘언제’의 시간이 김남표 작가에 오후 5시가 된다는 사실을 예감한다. 그래서 그 시간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흘러내리거나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액체로 된 물감이라는 매체이자 재료는 그렇게 아래에서 위로 흘러내리고 위에서 아래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순간 육신으로 이루어진 정신으로 기체화되고 물질로 이루어진 사유로 고체화된다. 회화를 이렇듯 기이한 변증법의 때와 곳, 곧 시간 자체가 뒤집히고 공간 자체가 뒤틀리는 그러한 변용의 시공간이라 불러볼까.
5. 그러나 회화는 시간을 그리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시간을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견 회화는 오직 공간을 그리며 그 스스로도 그러한 공간 안에 위치해 하나의 공간을 개시할 뿐인 것처럼 보인다. 회화가 시간을 그릴 수 있다고 할 때에도 그것은 시간이라는 환영을 재현하는 것이지 시간 자체를 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회화는, 그 자신이 지닌 공간적 한계를 확인함으로써 바로 그 공간을 위반할 때에, 그리고 시간을 그릴 수 없다는 불가능에서 출발하면서도 동시에 끝없이 그 시간을 초월하고자 하는 투쟁을 지속하는 곳에서, 비로소 그 모든 부재들로서/써 존재할 수 있는 역설의 상처가 낸 흔적이 된다. 그렇기에 회화는 무엇보다 상처의 전시이다. 뽐내기만 하는 자랑스러운 전시가 아니라 숨기듯 내보이고 감추듯 드러내는 역전된 외설과 수치와 회환과 복수의 전시이다. 시간의 축을 갖지 못한 듯 보이는 평면에 하나의 결과로서 펼쳐진 흔적들은 그 찢겨진 육체가 걸어가는 핏빛―그렇다고 이 핏빛이 꼭 붉은색일 필요는 없다―발걸음의 여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회화는 그 정적 공간을 통해 거꾸로 동적 시간을 전시한다. 전시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내건다는 뜻이다. 회화는 자신의 공간을 통해 보이지 않는 시간을 그렇게 시체처럼 내걸어 펼쳐 보여준다. 시체가 기뻐하거나 자랑할 만한 것이기에 내거는 것이 아니라, 회화는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을 내건다. 시체야말로 시간의 흔적이자 공간의 구멍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공간 안팎에서 드러나는 것은 형태가 아니라 형해, 고정이 아니라 고행, 아묾이 아닌 벌어짐, 일시적 봉합이 아닌 영원한 생채기, 끝끝내 남겨진 잔여의 수거 가능성이 아닌 끊임없이 남기는 흔적들의 수행 (불)가능성이 된다. 회화는 상처들을 부끄러워하면서도 동시에 보여주고, 그 구멍의 흔적들을 후회하면서도 동시에 영광스럽게 드러낸다. 그리하여 또한 평면으로서의 회화는 바로 이러한 수행성(performativité)이 지니는 근본적 상처와 흔적의 불가능한 사태, 그 사태에 대한 지금‐여기의 전시이다. 이 지금‐여기라는 때와 곳이 또한 현기증 나는 저 구멍의 (불)가능성이 오직 비가시적으로만 가시화하는 회화적 사태이다. 그래서 이러한 내걺으로서의 전시는 또한 다시 한 번 하나의 변증법적 시간의 경험, 시대착오적 공간의 현시가 된다. 시체와 흔적과 구멍에 대한 경험과 현시. 회화가 역사라는 시공간을 그리게 되는 이유가 또한 여기에 있다.
6. 회화와 역사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일단 이 역사는 단지 회화사나 예술사가 아니다. 구상이 추상의 원초적인 이전 단계라든가 거꾸로 추상이 구상의 발전적인 이후 단계라든가 하는 식의 ‘역사적’ 구분은 지금‐여기 우리 앞에 놓인 회화의 성격을 잘 설명해주지 못한다. 구상은 추상의 메워진 흔적이며, 추상은 구상의 벌어진 구멍이다. 흩어진 상처들이 남긴 추상적 흔적으로서의 구상이라는 형태(존재), 벌어짐과 메워짐을 반복하고 있는 구상적 상처로서의 추상이라는 구멍(부재), 이 흩뿌려진 재질/물질(matériau/matière)의 물리적 연장과 점유, 그리고 그와 교차하고 있는 기관들의 심리적 분화와 탈구 속에서, 거꾸로 뒤집힌 구성이 태어난다. 그 구성은 매끈한 표면과 우툴두툴한 구멍을 모두 갖고 있다. 우리는 표면이 닳아서 구멍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지만, 그 역으로 오히려 구멍이 표면을 낳는 것이며―곧, 구상에서 추상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추상이 잠에 들어 꾸는 꿈이 구상이라는 괴물을 낳는다―오히려 이 관계는 차라리 비시간적이며 비선형적이다. 그 어느 것도 먼저 있지 않고, 동시에 서로 잇대어 존재/부재한다. 여기서는 추상과 구상 사이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며, 위와 아래, 똑바로 선 것과 거꾸로 뒤집힌 것 사이의 구분도 없어진다. 그러한 방향성의 존재들은 오직 그 방향들의 부재로서만 존재한다. 그래서 중력은 단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힘이 아니라, 주변이 중심을 끌어당기는 힘, 아니, 차라리 모든 주변 없는 중심들―그렇다면 여전히 그 중심들을 ‘중심’이라는 말로 부를 수 있을까―사이의 시커먼 구멍에서 일어나는 상대적 방향성들의 힘이다. 이미지의 중력은 이렇듯 상대적인 것이지만 그렇다고 상대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이미지의 블랙홀은 무엇보다 하나의 구멍이며, 회화를 통해 우리는 끝끝내 그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바로 그 구멍에 가장 가깝게 밀착하여 그 안과 밖을 들여다보려 한다. 회화의 가시성이라는 존재적 가능성이 언제나 구멍의 비가시성이라는 근본적 불가능성 위에 놓여 있다는 역설은 바로 이러한 사태로 인해 가능해지는 불가능이다. 우리는 그 구멍의 안팎에서 곤두박질치면서, 똑바로 선 것도 없고 뒤집힌 것도 없는 이미지의 혼돈을 그 자체로 응시한다. 그래서 그 응시란 평온한 사변이 아니라 폭력적 명상이다. 이미지는 음란하기에 외설적인 것이 아니라 이렇듯 근본적으로 폭력적이기에 외설적인 것이다. 뒤집힌 이미지를 바로 세워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시각 자체가 이미 그러한 뒤집힘이라는 반대 항을 항상 어떤 ‘얽힘’의 형태로 시간 없는 동시성의 상태로서 상정하고 있었던 것임을 깨달을 것인가. 그러므로 이것은 선택할 수 없는 선택의 물음, 결정 없는 결정이라는 불확정적 선택의 물음이다. 뒤집힌 이미지를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서 우리는 굳이 우리의 몸을 뒤집을 필요가 없었다. 뒤집힌 것도 똑바로 서 있는 것도 따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그 부재를 그저 응시하라, 이 얽힌 외설과 이 얽은 얼굴을 마주하라, 얼굴은 없다, 눈이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여기 사람이 있다, 아니 그저 무엇이 있어서,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어서, 여기 삶의 덩어리가 연기처럼, 그렇게 죽음처럼 복음처럼 널려 전시된다. 십자가에 내걸린 시체는 다시 살아나 펄떡거리는 신체가 되어 들리지 않는 비를 뿌리고, 대관식을 치르고는 그 직후 폐위돼버린 왕의 신체 위에 다시 생생한 주검들이 내려앉아 보이지 않는 핏빛 눈으로 쌓인다. 그러므로 다시,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이 죽음을 생생히 내포한 삶/생명을 보라, 동시에 바로 거기서 요동치며 살아 있는 죽음을 마주하라, 이 덩어리진 무엇, 이 연기로 화한 누군가, 그럼에도 끝끝내 조각나는 어떤 것을 바라보라, 그리고 기억하라. 이 기억의 월계관이 우리에게 또 다른 망각의 왕관을 씌우며, 그 기억과 망각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우리의 목을 칼날이 되어 칠 것이다.
7. 그렇다면 회화가 갖는 역사의 몸이란 어떤 것인가. 스스로 선택되었다고 믿는 군중은 화면 속에서 재차 인용되고 수차 반복되면서 무덤을 파헤쳐서 갓 꺼낸 펄떡거리는 핏빛 몸뚱이들을 선사받는다. 그렇게 몸을 입는다. 이를 불경하게도 부활이라고 불러볼까. 인간의 머리 위에 내려졌던 왕관은 바로 그 목을 잘라 취하는 머리로써 자신이 진 빚의 값을 되돌려 받는다. 그렇게 변제는 이행된다. 이를 끔찍하게도 역사라고 불러볼까. 잿빛 화면이 핏빛 몸들로 채워질 때, 형태는 윤곽을 포기하고 오직 그 죽음의 색채만을 그 부활과 역사의 잔혹한 대차대조표로 취한다. 이 잔혹의 흩어진 색채가 핏빛이라고 해도 좋다. 이 대차대조표의 희미해진 흔적들이 회화라고 해도 좋다. 구멍은 또한 그때 거기에 있다. 몸은 몸 그 자체로 핏빛을 뿜은/품은 채 그렇게 그대로 있는 듯 보이지만, 회화는 그 몸들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몸들 밖으로 삐져나오고 파헤쳐져 드러난 선뜩한 기관들을 전시한다. 그래서 그 전시란 보이는 이미지의 안팎에서, 바로 그 앞과 뒤와 옆이라는 상대적 위치들에 도사린 기관들의 박동과 피와 근육과 살과 분비물과 운동방향을 보이지 않게 드러내는 입체적이고도 비체적인 행위가 된다. 회화의 안팎에서 회화 그 자신이 평면으로부터 입체가 되는 방식, 어떤 것이던 물체에서 아무것도 아닌 비체가 되는 과정이 또한 이때 여기에 있다. Objet-Abject. 우리가 그 평면이라는 회화의 화면 속에 갇힌 동시에 바로 그 평면을 뚫고나와 흘러내림을 경험하는 것은 이러한 기관의 이물감이 주는 물컹거림, 동질성이라고 믿었던 이질성의 근원, 그 비체의 외설스러움, 그 몸 아닌 몸이 피 아닌 피의 색채로 현시하는 이질감의 육체성이다. 역사는 화면 안에 들어와 바로 그 화면 속으로 증발하고 말지만, 그 역사의 휘발성이 의미하는 것은 탈‐역사도 몰‐역사도 아니라 이러한 비시간적 부활의 시간이 지닌 어떤 변증법이다. 이 부활의 변증법적 시간은 오직 역사 그 자체의 과‐몰입된 역사성을 스스로 흡입하고 사혈하여 체내로 흡수하면서 동시에 분비하고 영양을 얻는 동시에 배설함으로써 배출(excétion)로서의 창조(création)을 감행하고 실천한다. 이 미천한 실천, 이 비천한 감행, 이 ‘낮은 유물론(bas matérialisme)’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어떤 드물고 고귀한 ‘주권적’ 정신의 육체가 현현한다. 현현이란 이렇듯 물질적으로 정신적인 것, 이렇게 비천하도록 성스러운 것이다. 정신은 그렇게 몸을 입게 되었지만, 그 몸은 언제나 핏빛을 머금고 자신의 장기들을 몸 밖으로 걸어 전시해 그 스스로가 몸임을 드러내며, 그렇게 그 기관들은 언제나 그 몸 밖에서 펄떡이며 너덜거리는 정신을 전시한다. 이미지 자체의 근본적 외설이 가져오는 폭력의 현시는 그렇게 회화의 화면을 넘어 다시금 그 회화적 금기의 한계점을 확인하면서 다시금 그 금기 자체로 되돌아오는 기이한 위반과 뒤틀린 배신 안에서 근본적으로 빛나고 있는 하나의 왕관을 다시 쓴다. 그리하여 이 왕관이 지닌 주권(souveraineté)의 의미가 다시 한 번 이 역사와 부활의 변증법 안에서 완성되고 파괴된다. 월계관은 왕관을 내려주고 다시 그 왕관은 그 밑의 머리를 취한다. 그 머리는 잘려나가 바닥에 뒹군다. 이는 우리가 그러한 참수를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왕관의 가시성 그 자체가 바로 저 보이지 않게 잘려나간 목의 비가시성에 근본적으로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대관식의 의미와 무의미, 그것의 비지(非知, non‐savoir), 그 외설적이고도 신성한 주권의 내용‐형식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회화는 바로 이러한 살해와 부활, 역사와 비시간성을 동시에 품는 장소이다.
8. 그리하여 회화가 현시하는 역사란 결국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는 메타‐역사가 될 수 없다. 그 스스로가 자신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자신을 바라보는 유체이탈의 시선과도 같은 메타‐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눈을 바라보는 또 다른 상위의 눈이란 것은 또 다른 허상이다. 회화라는 하나의 ‘장르’가 지닌 역사는 회화 그 자체가 다룰 수 없는 전혀 다른 것, 말하자면 언어적인 것이다. 회화는 언어가 아니다. 그렇기에 회화는 역사에 대해 말할 수 없고, 오직 역사를 그릴 수만 있다. 다시 말해, 회화가 만약 역사를 현시한다면, 그러한 현시란 회화 자신의 역사적 변천과 한계에 대한 어떤 발화적 ‘지시’가 아니라, 역사라는 개념 자체를 자기파괴에 가까운 자기반복과 자기차이를 통해 그림으로써 바로 그 회화 안에서 불가능한 부활처럼 이루어지는 어떤 ‘계시 없는 계시’가 된다. 이미지의 현시란, 무언가를 결정하는 화면의 지시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부터 어떤 것이 출현하는 불확정적 구멍의 계시이다. 곧 회화는 그렇게 자신의 안을 통해 바깥을 현시하며, 다시 그 바깥을 돌아와 자신의 안을 응시한다. 회화는 언어가 아니며 언어일 수도 없고 언어여서도 안 되지만, 동시에 바로 그렇기에 그 언어의 한계를 끊임없이 간지럽히는 또 하나의 비언어적 언어를 꿈꾼다. 언어 또한 회화처럼 검은 구멍이기 때문이다. 회화는 자신의 안에서 비로소 그 자신의 밖에 위치한 역사라는 언어 자체를 그렇게 가장 비언어적으로 ‘언명’한다. 구멍은 구멍을 통해서 말할 수밖에 없는 것, 구멍이 구멍 그 자체를 그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그리려고 하는 회화의 상처가 낸 어떤 의지의 흔적일 수밖에 없듯이. 그 말 아닌 말, 그림 아닌 그림이 지닌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가능성 자체가 바로 회화라는 역사와 부활의 변증법적 시간의 화면이 되는 것이다. 이 화면은 뚫려 있음과 동시에 가득 차 있는 공허의 표면이다. 이는 다시 말해,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l’heure entre chien et loup), 적과 동지 사이의 구분이라는 피아구별이 흐릿해지는 시간, 말할 수 없으면서도 말할 수밖에 없고 그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릴 수밖에 없는 사이의 시간, 그러한 구멍의 장소가 된다. 그 사이에서, 그 간극에서, 그 흔적들의 틈에서, 그 결정될 수 없는 혼돈의 틈바구니에서, 구멍이 그 어둠을 벌린다/벌인다. 그리고 또 한 번의 다시 한 번, 그 구멍에는 얼굴이 없다.
9. 돌고 돌아와 다시 묻게 되는, 저 시간에 대한 물음의 형태는 이렇듯 일견 장소에 대한 물음이라는 모습을 재차 띠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화가는 어디에서 그리는가. 바로 그 구멍 곁에서. 끝없이 자신의 빛마저 그 검은 구멍의 중력 안으로 빼앗기면서도 끝끝내 그 사건의 지평선 곁을 맴돌면서, 구멍에 빠지지 않으려는 의지와 동시에 구멍 안으로 뛰어들고자 하는 반(反)‐의지를 품고서. 화가는 그렇게 회화라는 구멍을 앞에 두고 바로 구멍 곁에서 구멍을 응시하며 그리려는 동시에 그리지 않으려는, 실패의 가능과 감행의 불가능을 동시에 겪고 행하는 역설의 존재이다. 그렇기에 그 회화의 구멍은 장소이자 동시에 비(非)‐장소, 화가가 존재하는 공간이자 회화 자체가 부재하는 공간, 그린다는 행위가 오히려 바로 그 순간 속에서 언제나 부재와 함께 존재하는 시간이자 비(非)‐시간이다. 그리하여 또 다시 한 번 저 앞의 물음을 뒤틀어 배신하여 부활시키자면, 그래서 그 물음에 우리의 비시간적 역사를 부여하자마자 또한 빼앗아가자면, 그것은 애초부터 ‘어디’라는 장소를 묻는 물음이 아니었다. 그 물음의 방점은 마지막 말 ‘그리는가’라는 의문형 자체에 찍혀야 한다. ‘언제’와 ‘무엇’과 ‘어디’와 ‘어떻게’와 ‘누구’와 ‘왜’를 넘어, 혹은 ‘언제’라는 시간과 ‘어디’라는 공간 사이의 틈새에서, ‘어떻게’라는 방법과 ‘왜’라는 이유 사이의 괴리에서, ‘누구’와 ‘무엇’이 서로 먼저랄 것도 없이 혼돈스럽게 숨으면서 드러나는 저 구멍에서. 그리는가, 그러므로 주어 없이 그저 동사로만 묻자면, 그렇게 그리는가. 구멍이, 그리고 또한 주어 아닌 주어를 자격도 없는 주격조사를 붙여 그저 발음하자면, 그렇게 구멍이. 이 구멍이 기관 없는 온 몸으로 회화를 환대하며 불러들이는 시간, 반대로 그렇게 저 회화가 여러 개의 팔들을 벌려 존재하지 않는 기관들로 구멍을 환영하여 받아들이는 공간, 그때, 그곳은, 마치 새벽 5시와도 같은 오후 5시, 바로 지금 여기이다. ◼️襤魂 최정우
1. 화가는 언제 그리는가. 이 물음은 ‘왜’라는 이유나 ‘어떻게’라는 방법을 묻지 않고 오직 회화가 그려지는 때를 묻는다. 그럴 때, 회화는 무엇을 그리는가, 혹은 그리지 않는가. 이 물음의 방점 또한 ‘무엇’이라는 대상의 의문사가 아니라 차라리 ‘그런가’ 혹은 ‘아닌가’라는 긍정문과 부정문 사이의 선택지에 찍혀 있다. 내가 김남표 작가의 작업을 둘러싸고서 대답되지 않는―혹은 묻는 동시에 끝없이 대답되고 있는―질문의 형태로 쓰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간 아닌 시간과 결정 없는 결정에 관한 파편들이 될 것이며, 또한 그 파편들을 가능하게 한 구멍의 불가능성에 관한 하나의 정신분석이 될 것이다. 이 파편들을 그릴 수 있을까, 혹은, 예견하며 비껴가자면, 그 파편들이 파놓거나 그 파편들을 만들어놓은 구멍을 그릴 수 있을까. 그래서 이는 다시금 하나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이 된다. 회화의 (불)가능성. 아마도 혹은 절대로, 알아볼 수 없게 산산이 조각난 몸 위에서라야 비로소 뜨이는 눈의 모습으로(눈은 하나의 구멍이다), 그러나 또한 그렇게 흩어져서는 다시 스스로 이을 수 없는 것들을 이어 붙이는 기이한 기관들의 메아리 없는 외침을 매순간 처음처럼 듣는 귀의 모습으로(귀 역시 또 다른 구멍이다). 그 구멍의 시각은 오후 5시, 저 눈은 시침이 도달한 곳을 바라보고, 그때 저 귀는 분침이 정각으로 넘어가는 소리를 듣는다.
2. 구멍은 실체가 아니라 실체를 만들어내는 빈칸이다. 흐릿하고 어두운 빈칸은 색채와 형상이라는 시각적 실체의 조건이다. 흩어지는 색채 속에서, 그와 함께 흐려지는 것은 형상일 뿐만 아니라 음향이기도 하다. 분명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 형태가 흐려지는 지점에서, 문득 그와 동시에 사라지고 있는 것은 들려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 소리이다. 감각은 의식에 대한 배신이다. 그리고 그 배신을 끝없이 의식하며 그럼에도 오로지 감각으로 그려내야 하는 것이 다름 아닌 회화의 운명이다. 왜냐하면 감각은 바로 그러한 의식에 대한 배신을 통해 태어나며, 다시 그러한 감각에 대한 배신이 또 다른 사유를 낳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회화는 감각의 사유, 사유의 감각이 지닐 수 있는 운명적 내용‐형식이다. 회화가 다룰 수 있으며 또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 영역이란, 어쩌면 바로 이러한 배신의 영역, 의식과 감각과 사유가 끝없이 서로 충돌하는 어떤 몸 안일/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회화가 그 눈먼 눈의 헛된 시각으로 포착하고자 하는 것은, 그 끝없는 실패의 예감 속에서 거꾸로 자신의 귀머거리 귀로 더욱 분명히 듣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저 명멸하는 침묵의 소리, 가시적 형태의 형해가 도리어 더욱 분명한 윤곽을 만들어내는 어떤 비가시성이다. 헤매듯 사라져가는 소리들이 역설적으로 바로 그 소리들의 부재인 침묵 속에서 들려오듯이, 보이지 않게 흐려져 가는 부재의 형태가 바로 그 흩어짐 속에서 뿌연 연기처럼 분명한 존재로 드러난다. 회화는 그래서 연기이자 덩어리이다. 우리는 흔히 연기의 존재를 그저 흐리거나 불분명하다고 말하지만, 마치 그 연기의 존재 자체는 피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하나의 뚜렷하고 분명한 것이듯. 그래서 추상이 구상을 먹어버린 듯 보이는 지점에서, 구상이 추상으로 점차적으로 대체되어가거나 추상이 구상을 불현듯 출현시키는 듯 보이는 화면 속에서, 그렇게 침묵의 소리가, 구분할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마치 화면 밖으로 흘러나온 축축한 혀처럼, 화면 옆으로 삐져나온 뒤틀린 귀처럼, 하나의 시각적 청각으로 놓여 있다. 그렇게 회화는 연기이자 덩어리로서 하나의 구멍이 되며, 그 구멍은 입처럼 벌어져 목과 귀와 코와 성기 등의 다른 구멍의 기관들로 변용한다, 먹거나 마시는 기관이었던 입은 그렇게 위상기하학적(topologique)으로 변형되어 더 이상 입이 아닌 또 다른 구멍들, 무엇보다/무엇이나 보는 즉시 빨아들이는 응시의 희뿌연 고글, 먹는 즉시 흘러내리는 분비의 꽉 막힌 샤워기, 듣는 즉시 귀에 걸어서는, 삼키던 입을 막고 냄새 맡던 코를 가려 아예 못 쓰게 만들어버리고 전혀 다른 기관들로 바꿔버리는 닳아빠진 마스크,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즉시 넘쳐흐르는 침묵을 송출하는 망가진 스피커가 된다. 거기에 그렇게 부재하며 존재하는 구멍이 있다. 회화는 이러한 부재와 존재 사이의 틈, 그 구멍의 전장이다.
3. 무엇보다, 구멍은 보이지 않는다. 구멍은 비가시성의 가시화이다. 회화는 그 구멍을 그릴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구멍이 거기에 있음을 알고 있다. 그렇게 안다고 생각하고, 안다고 느낀다. 하나의 근본적 역설이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을 오직 보이는 것을 통해 그려내야 하는 것은 어쩌면 회화의 끈질긴 운명, 고질적 행운, 짜릿한 천형이다. 그렇기에 회화는 그 구멍을 그릴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통해서만 역설적으로 비로소 가능해지는, 그 자체가 하나의 구멍이 되는 내용이자 동시에 형식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회화는 그 구멍을 그릴 수 없지만, 그렇게 그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내용‐형식이 될 수 있다. 그 보이지 않는 것이란 역사적으로나 미학적이거나 종교적으로, 때로는 진리, 때로는 힘, 때로는 무(無) 또는 공(空), 때로는 구조나 주제, 의미나 방향 또는 감각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다. 이 이름들은 바로 그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보고자 붙인 명칭들, 곧 그 보이지 않는 심해의 것들을 어떻게든 붙잡으려고 흔들리는 수면 위에 우리가 가까스로 띄워놓은 부표들이다. 그래서 또 다시 한 번, 근본적으로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그것들을 사유하거나 감각할 수 있는 기관들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부재를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부정의 기관들을 갖고 있는 존재, 바로 그 부재를 느낄 수 있는 존재, 오직 부재를 통해서만 구멍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는 역설의 행위자/감지자이다. 우리 존재의 예술적 비극성, 아니 차라리 우리가 행하고 향유하며 고통 받고 있는 비극적 예술성이 바로 이러한 부재의 존재라는 우리 존재/부재의 특질에서 기인한다. 회화를 포함한 예술이 출발해서 되돌아가고 그럼에도 귀환하지 못한 채 뒤집어져 난파하지만 끝끝내 다시 출항을 감행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 지점의 부재를 감각하고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우리 자체가 하나의 구멍인 기관 전체이다. 회화는 이러한 우리 존재의 구멍이 통행하는 길이다. 이 길은 그 스스로 하나의 기관이 됨으로써 신체를 낳고 다시금 그 신체는 이전에 없었던 기관들을 분화시킨다. 신체는 분화된 기관 이전에, 그러한 기관 없이, 바로 그 기관들 자체를 하나의 부분임과 동시에 하나의 전체로서 매순간 창출하고 그렇게 전 존재가 그 기관 자체가 됨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신체가 된다. 회화는 이러한 신체와 기관들의 해부도이다. 우리는 우리 자체가 이미 해부된 몸으로서 바로 이 해부도로서의 회화 앞에 서 있다.
4. 흔히 회화는 사태에 대한 다른 시각, 곧 세계에 관한 뒤집힌 관점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뒤집히는 것은 시각이나 관점이 아니라 신체 자체이다. 신체의 시각이 물리적으로 뒤집히지 않는다면 정신적으로만 뒤집히는 관점의 전복은 이론으로만 머무를 수 있다. 이론으로만 머문다는 것이 딱히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예술로서의 회화는 단지 이론적으로만 미학적인 것이 아니라 그를 넘어선 어떤 ‘윤리적’인 것을 요구한다. 윤리적인 것이란 도덕적인 것과는 다르다. 윤리(éthos)는 단순한 미학적 감상을 넘어 어떤 결단과 행동을 요구하는 무엇, 그래서 다시금 그 진정하고 근본적인 의미에서 가장 윤리적(éthique)이고 가장 미학적(esthétique)인 것이 되는 무엇이다. 그래서 회화는 우리 신체의 뒤집힘을 요구한다. 뒤집히는 것은 신체 그 자신이어야 한다. 그렇게 뒤집힌 신체는 그때서야 비로소 사태를 똑바로 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 바로 서 있었던가 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공존하는 시간 없는 시간의 물음과 함께. 사태의 본질 자체가 원래부터 뒤집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형상이란 단지 그것이 형상처럼 보이는 것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곧 형상이라는 것이 바로 형상의 불가능성 자체를 자신의 토대이자 근본조건으로 삼고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했다는 사실을 감지하는 순간, 그 형상은 비로소 형상이 된다. 뒤집힌 신체가 비로소 바로 선 형상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보이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의 보이지 않는 성격, 바로 그 불가능성 위에 물구나무를 설 때 그 비가시성이 하나의 가시성으로 포착된다. 회화가 그리는 ‘언제’는 바로 이러한 변증법의 시간이다. 나의 첫 물음이 ‘언제’라는 때를 물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 ‘언제’의 시간이 김남표 작가에 오후 5시가 된다는 사실을 예감한다. 그래서 그 시간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흘러내리거나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액체로 된 물감이라는 매체이자 재료는 그렇게 아래에서 위로 흘러내리고 위에서 아래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순간 육신으로 이루어진 정신으로 기체화되고 물질로 이루어진 사유로 고체화된다. 회화를 이렇듯 기이한 변증법의 때와 곳, 곧 시간 자체가 뒤집히고 공간 자체가 뒤틀리는 그러한 변용의 시공간이라 불러볼까.
5. 그러나 회화는 시간을 그리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시간을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견 회화는 오직 공간을 그리며 그 스스로도 그러한 공간 안에 위치해 하나의 공간을 개시할 뿐인 것처럼 보인다. 회화가 시간을 그릴 수 있다고 할 때에도 그것은 시간이라는 환영을 재현하는 것이지 시간 자체를 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회화는, 그 자신이 지닌 공간적 한계를 확인함으로써 바로 그 공간을 위반할 때에, 그리고 시간을 그릴 수 없다는 불가능에서 출발하면서도 동시에 끝없이 그 시간을 초월하고자 하는 투쟁을 지속하는 곳에서, 비로소 그 모든 부재들로서/써 존재할 수 있는 역설의 상처가 낸 흔적이 된다. 그렇기에 회화는 무엇보다 상처의 전시이다. 뽐내기만 하는 자랑스러운 전시가 아니라 숨기듯 내보이고 감추듯 드러내는 역전된 외설과 수치와 회환과 복수의 전시이다. 시간의 축을 갖지 못한 듯 보이는 평면에 하나의 결과로서 펼쳐진 흔적들은 그 찢겨진 육체가 걸어가는 핏빛―그렇다고 이 핏빛이 꼭 붉은색일 필요는 없다―발걸음의 여정을 보여준다. 그래서 회화는 그 정적 공간을 통해 거꾸로 동적 시간을 전시한다. 전시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내건다는 뜻이다. 회화는 자신의 공간을 통해 보이지 않는 시간을 그렇게 시체처럼 내걸어 펼쳐 보여준다. 시체가 기뻐하거나 자랑할 만한 것이기에 내거는 것이 아니라, 회화는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을 내건다. 시체야말로 시간의 흔적이자 공간의 구멍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공간 안팎에서 드러나는 것은 형태가 아니라 형해, 고정이 아니라 고행, 아묾이 아닌 벌어짐, 일시적 봉합이 아닌 영원한 생채기, 끝끝내 남겨진 잔여의 수거 가능성이 아닌 끊임없이 남기는 흔적들의 수행 (불)가능성이 된다. 회화는 상처들을 부끄러워하면서도 동시에 보여주고, 그 구멍의 흔적들을 후회하면서도 동시에 영광스럽게 드러낸다. 그리하여 또한 평면으로서의 회화는 바로 이러한 수행성(performativité)이 지니는 근본적 상처와 흔적의 불가능한 사태, 그 사태에 대한 지금‐여기의 전시이다. 이 지금‐여기라는 때와 곳이 또한 현기증 나는 저 구멍의 (불)가능성이 오직 비가시적으로만 가시화하는 회화적 사태이다. 그래서 이러한 내걺으로서의 전시는 또한 다시 한 번 하나의 변증법적 시간의 경험, 시대착오적 공간의 현시가 된다. 시체와 흔적과 구멍에 대한 경험과 현시. 회화가 역사라는 시공간을 그리게 되는 이유가 또한 여기에 있다.
6. 회화와 역사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일단 이 역사는 단지 회화사나 예술사가 아니다. 구상이 추상의 원초적인 이전 단계라든가 거꾸로 추상이 구상의 발전적인 이후 단계라든가 하는 식의 ‘역사적’ 구분은 지금‐여기 우리 앞에 놓인 회화의 성격을 잘 설명해주지 못한다. 구상은 추상의 메워진 흔적이며, 추상은 구상의 벌어진 구멍이다. 흩어진 상처들이 남긴 추상적 흔적으로서의 구상이라는 형태(존재), 벌어짐과 메워짐을 반복하고 있는 구상적 상처로서의 추상이라는 구멍(부재), 이 흩뿌려진 재질/물질(matériau/matière)의 물리적 연장과 점유, 그리고 그와 교차하고 있는 기관들의 심리적 분화와 탈구 속에서, 거꾸로 뒤집힌 구성이 태어난다. 그 구성은 매끈한 표면과 우툴두툴한 구멍을 모두 갖고 있다. 우리는 표면이 닳아서 구멍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지만, 그 역으로 오히려 구멍이 표면을 낳는 것이며―곧, 구상에서 추상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추상이 잠에 들어 꾸는 꿈이 구상이라는 괴물을 낳는다―오히려 이 관계는 차라리 비시간적이며 비선형적이다. 그 어느 것도 먼저 있지 않고, 동시에 서로 잇대어 존재/부재한다. 여기서는 추상과 구상 사이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며, 위와 아래, 똑바로 선 것과 거꾸로 뒤집힌 것 사이의 구분도 없어진다. 그러한 방향성의 존재들은 오직 그 방향들의 부재로서만 존재한다. 그래서 중력은 단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힘이 아니라, 주변이 중심을 끌어당기는 힘, 아니, 차라리 모든 주변 없는 중심들―그렇다면 여전히 그 중심들을 ‘중심’이라는 말로 부를 수 있을까―사이의 시커먼 구멍에서 일어나는 상대적 방향성들의 힘이다. 이미지의 중력은 이렇듯 상대적인 것이지만 그렇다고 상대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이미지의 블랙홀은 무엇보다 하나의 구멍이며, 회화를 통해 우리는 끝끝내 그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바로 그 구멍에 가장 가깝게 밀착하여 그 안과 밖을 들여다보려 한다. 회화의 가시성이라는 존재적 가능성이 언제나 구멍의 비가시성이라는 근본적 불가능성 위에 놓여 있다는 역설은 바로 이러한 사태로 인해 가능해지는 불가능이다. 우리는 그 구멍의 안팎에서 곤두박질치면서, 똑바로 선 것도 없고 뒤집힌 것도 없는 이미지의 혼돈을 그 자체로 응시한다. 그래서 그 응시란 평온한 사변이 아니라 폭력적 명상이다. 이미지는 음란하기에 외설적인 것이 아니라 이렇듯 근본적으로 폭력적이기에 외설적인 것이다. 뒤집힌 이미지를 바로 세워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시각 자체가 이미 그러한 뒤집힘이라는 반대 항을 항상 어떤 ‘얽힘’의 형태로 시간 없는 동시성의 상태로서 상정하고 있었던 것임을 깨달을 것인가. 그러므로 이것은 선택할 수 없는 선택의 물음, 결정 없는 결정이라는 불확정적 선택의 물음이다. 뒤집힌 이미지를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서 우리는 굳이 우리의 몸을 뒤집을 필요가 없었다. 뒤집힌 것도 똑바로 서 있는 것도 따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그 부재를 그저 응시하라, 이 얽힌 외설과 이 얽은 얼굴을 마주하라, 얼굴은 없다, 눈이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여기 사람이 있다, 아니 그저 무엇이 있어서,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어서, 여기 삶의 덩어리가 연기처럼, 그렇게 죽음처럼 복음처럼 널려 전시된다. 십자가에 내걸린 시체는 다시 살아나 펄떡거리는 신체가 되어 들리지 않는 비를 뿌리고, 대관식을 치르고는 그 직후 폐위돼버린 왕의 신체 위에 다시 생생한 주검들이 내려앉아 보이지 않는 핏빛 눈으로 쌓인다. 그러므로 다시,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이 죽음을 생생히 내포한 삶/생명을 보라, 동시에 바로 거기서 요동치며 살아 있는 죽음을 마주하라, 이 덩어리진 무엇, 이 연기로 화한 누군가, 그럼에도 끝끝내 조각나는 어떤 것을 바라보라, 그리고 기억하라. 이 기억의 월계관이 우리에게 또 다른 망각의 왕관을 씌우며, 그 기억과 망각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우리의 목을 칼날이 되어 칠 것이다.
7. 그렇다면 회화가 갖는 역사의 몸이란 어떤 것인가. 스스로 선택되었다고 믿는 군중은 화면 속에서 재차 인용되고 수차 반복되면서 무덤을 파헤쳐서 갓 꺼낸 펄떡거리는 핏빛 몸뚱이들을 선사받는다. 그렇게 몸을 입는다. 이를 불경하게도 부활이라고 불러볼까. 인간의 머리 위에 내려졌던 왕관은 바로 그 목을 잘라 취하는 머리로써 자신이 진 빚의 값을 되돌려 받는다. 그렇게 변제는 이행된다. 이를 끔찍하게도 역사라고 불러볼까. 잿빛 화면이 핏빛 몸들로 채워질 때, 형태는 윤곽을 포기하고 오직 그 죽음의 색채만을 그 부활과 역사의 잔혹한 대차대조표로 취한다. 이 잔혹의 흩어진 색채가 핏빛이라고 해도 좋다. 이 대차대조표의 희미해진 흔적들이 회화라고 해도 좋다. 구멍은 또한 그때 거기에 있다. 몸은 몸 그 자체로 핏빛을 뿜은/품은 채 그렇게 그대로 있는 듯 보이지만, 회화는 그 몸들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몸들 밖으로 삐져나오고 파헤쳐져 드러난 선뜩한 기관들을 전시한다. 그래서 그 전시란 보이는 이미지의 안팎에서, 바로 그 앞과 뒤와 옆이라는 상대적 위치들에 도사린 기관들의 박동과 피와 근육과 살과 분비물과 운동방향을 보이지 않게 드러내는 입체적이고도 비체적인 행위가 된다. 회화의 안팎에서 회화 그 자신이 평면으로부터 입체가 되는 방식, 어떤 것이던 물체에서 아무것도 아닌 비체가 되는 과정이 또한 이때 여기에 있다. Objet-Abject. 우리가 그 평면이라는 회화의 화면 속에 갇힌 동시에 바로 그 평면을 뚫고나와 흘러내림을 경험하는 것은 이러한 기관의 이물감이 주는 물컹거림, 동질성이라고 믿었던 이질성의 근원, 그 비체의 외설스러움, 그 몸 아닌 몸이 피 아닌 피의 색채로 현시하는 이질감의 육체성이다. 역사는 화면 안에 들어와 바로 그 화면 속으로 증발하고 말지만, 그 역사의 휘발성이 의미하는 것은 탈‐역사도 몰‐역사도 아니라 이러한 비시간적 부활의 시간이 지닌 어떤 변증법이다. 이 부활의 변증법적 시간은 오직 역사 그 자체의 과‐몰입된 역사성을 스스로 흡입하고 사혈하여 체내로 흡수하면서 동시에 분비하고 영양을 얻는 동시에 배설함으로써 배출(excétion)로서의 창조(création)을 감행하고 실천한다. 이 미천한 실천, 이 비천한 감행, 이 ‘낮은 유물론(bas matérialisme)’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어떤 드물고 고귀한 ‘주권적’ 정신의 육체가 현현한다. 현현이란 이렇듯 물질적으로 정신적인 것, 이렇게 비천하도록 성스러운 것이다. 정신은 그렇게 몸을 입게 되었지만, 그 몸은 언제나 핏빛을 머금고 자신의 장기들을 몸 밖으로 걸어 전시해 그 스스로가 몸임을 드러내며, 그렇게 그 기관들은 언제나 그 몸 밖에서 펄떡이며 너덜거리는 정신을 전시한다. 이미지 자체의 근본적 외설이 가져오는 폭력의 현시는 그렇게 회화의 화면을 넘어 다시금 그 회화적 금기의 한계점을 확인하면서 다시금 그 금기 자체로 되돌아오는 기이한 위반과 뒤틀린 배신 안에서 근본적으로 빛나고 있는 하나의 왕관을 다시 쓴다. 그리하여 이 왕관이 지닌 주권(souveraineté)의 의미가 다시 한 번 이 역사와 부활의 변증법 안에서 완성되고 파괴된다. 월계관은 왕관을 내려주고 다시 그 왕관은 그 밑의 머리를 취한다. 그 머리는 잘려나가 바닥에 뒹군다. 이는 우리가 그러한 참수를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왕관의 가시성 그 자체가 바로 저 보이지 않게 잘려나간 목의 비가시성에 근본적으로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대관식의 의미와 무의미, 그것의 비지(非知, non‐savoir), 그 외설적이고도 신성한 주권의 내용‐형식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회화는 바로 이러한 살해와 부활, 역사와 비시간성을 동시에 품는 장소이다.
8. 그리하여 회화가 현시하는 역사란 결국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는 메타‐역사가 될 수 없다. 그 스스로가 자신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자신을 바라보는 유체이탈의 시선과도 같은 메타‐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눈을 바라보는 또 다른 상위의 눈이란 것은 또 다른 허상이다. 회화라는 하나의 ‘장르’가 지닌 역사는 회화 그 자체가 다룰 수 없는 전혀 다른 것, 말하자면 언어적인 것이다. 회화는 언어가 아니다. 그렇기에 회화는 역사에 대해 말할 수 없고, 오직 역사를 그릴 수만 있다. 다시 말해, 회화가 만약 역사를 현시한다면, 그러한 현시란 회화 자신의 역사적 변천과 한계에 대한 어떤 발화적 ‘지시’가 아니라, 역사라는 개념 자체를 자기파괴에 가까운 자기반복과 자기차이를 통해 그림으로써 바로 그 회화 안에서 불가능한 부활처럼 이루어지는 어떤 ‘계시 없는 계시’가 된다. 이미지의 현시란, 무언가를 결정하는 화면의 지시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부터 어떤 것이 출현하는 불확정적 구멍의 계시이다. 곧 회화는 그렇게 자신의 안을 통해 바깥을 현시하며, 다시 그 바깥을 돌아와 자신의 안을 응시한다. 회화는 언어가 아니며 언어일 수도 없고 언어여서도 안 되지만, 동시에 바로 그렇기에 그 언어의 한계를 끊임없이 간지럽히는 또 하나의 비언어적 언어를 꿈꾼다. 언어 또한 회화처럼 검은 구멍이기 때문이다. 회화는 자신의 안에서 비로소 그 자신의 밖에 위치한 역사라는 언어 자체를 그렇게 가장 비언어적으로 ‘언명’한다. 구멍은 구멍을 통해서 말할 수밖에 없는 것, 구멍이 구멍 그 자체를 그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그리려고 하는 회화의 상처가 낸 어떤 의지의 흔적일 수밖에 없듯이. 그 말 아닌 말, 그림 아닌 그림이 지닌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가능성 자체가 바로 회화라는 역사와 부활의 변증법적 시간의 화면이 되는 것이다. 이 화면은 뚫려 있음과 동시에 가득 차 있는 공허의 표면이다. 이는 다시 말해,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l’heure entre chien et loup), 적과 동지 사이의 구분이라는 피아구별이 흐릿해지는 시간, 말할 수 없으면서도 말할 수밖에 없고 그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릴 수밖에 없는 사이의 시간, 그러한 구멍의 장소가 된다. 그 사이에서, 그 간극에서, 그 흔적들의 틈에서, 그 결정될 수 없는 혼돈의 틈바구니에서, 구멍이 그 어둠을 벌린다/벌인다. 그리고 또 한 번의 다시 한 번, 그 구멍에는 얼굴이 없다.
9. 돌고 돌아와 다시 묻게 되는, 저 시간에 대한 물음의 형태는 이렇듯 일견 장소에 대한 물음이라는 모습을 재차 띠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화가는 어디에서 그리는가. 바로 그 구멍 곁에서. 끝없이 자신의 빛마저 그 검은 구멍의 중력 안으로 빼앗기면서도 끝끝내 그 사건의 지평선 곁을 맴돌면서, 구멍에 빠지지 않으려는 의지와 동시에 구멍 안으로 뛰어들고자 하는 반(反)‐의지를 품고서. 화가는 그렇게 회화라는 구멍을 앞에 두고 바로 구멍 곁에서 구멍을 응시하며 그리려는 동시에 그리지 않으려는, 실패의 가능과 감행의 불가능을 동시에 겪고 행하는 역설의 존재이다. 그렇기에 그 회화의 구멍은 장소이자 동시에 비(非)‐장소, 화가가 존재하는 공간이자 회화 자체가 부재하는 공간, 그린다는 행위가 오히려 바로 그 순간 속에서 언제나 부재와 함께 존재하는 시간이자 비(非)‐시간이다. 그리하여 또 다시 한 번 저 앞의 물음을 뒤틀어 배신하여 부활시키자면, 그래서 그 물음에 우리의 비시간적 역사를 부여하자마자 또한 빼앗아가자면, 그것은 애초부터 ‘어디’라는 장소를 묻는 물음이 아니었다. 그 물음의 방점은 마지막 말 ‘그리는가’라는 의문형 자체에 찍혀야 한다. ‘언제’와 ‘무엇’과 ‘어디’와 ‘어떻게’와 ‘누구’와 ‘왜’를 넘어, 혹은 ‘언제’라는 시간과 ‘어디’라는 공간 사이의 틈새에서, ‘어떻게’라는 방법과 ‘왜’라는 이유 사이의 괴리에서, ‘누구’와 ‘무엇’이 서로 먼저랄 것도 없이 혼돈스럽게 숨으면서 드러나는 저 구멍에서. 그리는가, 그러므로 주어 없이 그저 동사로만 묻자면, 그렇게 그리는가. 구멍이, 그리고 또한 주어 아닌 주어를 자격도 없는 주격조사를 붙여 그저 발음하자면, 그렇게 구멍이. 이 구멍이 기관 없는 온 몸으로 회화를 환대하며 불러들이는 시간, 반대로 그렇게 저 회화가 여러 개의 팔들을 벌려 존재하지 않는 기관들로 구멍을 환영하여 받아들이는 공간, 그때, 그곳은, 마치 새벽 5시와도 같은 오후 5시, 바로 지금 여기이다. ◼️襤魂 최정우
김남표(b.1970)의 “Instant Landscape”는 가장 대표적인 시리즈로 뛰어난 회화적 표현력과 독창적인 판타지로 국-내외에서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최근 그는 실제 경험한 풍경을 기반으로 회화적 확장을 목표로 영화, VR, 해외 레지던시, 드로잉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2024년 여름, 프랑스 파리의 시테(Cite) 레지던시에 참여할 예정이다.
Annapurna – 회화적 리얼리티, (OKMP갤러리, 부산, 2024), 제주도를 그리다(교보아트스페이스, 서울, 2022), Instant Landscape – Goosebumps(가나아트센터, 서울, 2017), Instant Landscape(가나아트 뉴욕, 2009), Instant Landscape(갤러리 현대-윈도우 갤러리, 서울, 2007) 등 국·내외에서 25회 이상의 개인전과 80회 이상의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조각가 윤두진과의 아티스트 그룹, ‘텐트’로 활동하고 있다. 아부다비(아랍에미리드), 아트센트럴(홍콩), KIAF(서울) 등의 국제적 아트페어에서 작품을 소개하고 있으며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성남문화재단, 수원아이파크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학부(B.F.A)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석사(M.F.A)를 받았다.
Annapurna – 회화적 리얼리티, (OKMP갤러리, 부산, 2024), 제주도를 그리다(교보아트스페이스, 서울, 2022), Instant Landscape – Goosebumps(가나아트센터, 서울, 2017), Instant Landscape(가나아트 뉴욕, 2009), Instant Landscape(갤러리 현대-윈도우 갤러리, 서울, 2007) 등 국·내외에서 25회 이상의 개인전과 80회 이상의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조각가 윤두진과의 아티스트 그룹, ‘텐트’로 활동하고 있다. 아부다비(아랍에미리드), 아트센트럴(홍콩), KIAF(서울) 등의 국제적 아트페어에서 작품을 소개하고 있으며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성남문화재단, 수원아이파크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학부(B.F.A)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석사(M.F.A)를 받았다.
구 멍
김남표 Nampyo Kim
2024.5.3-5.25
Opening reception 2024.5.3 17:00
일•월요일 휴무
운영시간_11:00-18:00
관람은 네이버 예약제로 운영됩니다. (토요일 상시 오픈)
Sunday, Monday off
Open hour_ 11:00-18:00
Reservation Only (excluding Saturday)
김남표 Nampyo Kim
2024.5.3-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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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시간_11:00-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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